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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인의 순교자

사진을 클릭하면 설명 보실 수 있음

신 보니파시오와 김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 38위 시복 시성 기도문

 

성자를 통하여 구원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부르시어

복음과 성 베네딕도의 정신으로 이 겨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사로 그들을 굳건하게 하시어

죽기까지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게 하셨나이다.  

 

인자하신 주님,

북녘 땅에서 굳은 신앙으로 당신 영광을 드러낸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바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복 시성의 영예를 허락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들의 헌신이 널리 현양되게 하소서.  

 

 저희도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본받아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냄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증거하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 교회의 주보이신 성모마리아와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사부 성 베네딕도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래는  평화방송 2010[6ㆍ25 전쟁 발발 60주년 특집]옥사덕 수용소 생존자 벨트비나 체사르 수녀를 만나다. 에서 발췌된 글입니다. 

 

1949년 5월 14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함흥분원에는 적막이 흘렀다. 분원장 벨트비나 체사르(Bertwina Caesar, 한국 이름 채인숙) 수녀를 비롯한 유럽 출신 수도자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이에 앞서 7일 제4대 원장인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선교는 끝났다"고 수도가족들에게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을 만큼 상황이 악화돼 있었고, 이어 10일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프리오랏, 수련소를 둔 원장좌 수녀원)이 공산당국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함흥분원 현관 초인종이 울리고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때 벨트비나 수녀를 비롯해 4명이 원산 임시교화소로 피랍됐다.

 그로부터 80여 일간에 걸친 원산ㆍ함흥ㆍ평양인민교화소 수감과 장장 4년 5개월에 걸친 '옥사덕수용소'(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에서의 수난이 이어진다. 당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에서 체포 투옥돼 강제수용됐던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는 모두 67명으로, 그 중 25명이 희생됐고 42명만이 살아남아 1954년 1월 12일 유럽으로 귀환한다. 피랍 초부터 1954년 1월 독일로 송환되기까지 전 수난 여정에 함께한 벨트비나 수녀는 생존자 42명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 있다. 6ㆍ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벨트비나 수녀가 노후를 보내는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의 초여름은 화사했다. 우리 나이로 97살이라는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벨트비나 수녀 또한 화사한 미소에 정정했다. 아직도 날마다 새벽 4시 30분이면 기상, 하루 네 차례씩 이어지는 공동 전례기도(Opus Dei)는 물론 개인 기도(Lectio Divina)에도 열심이다. 짬이 날 때마다 호미를 들고 다니며 수도원 정원 잔디밭 풀을 뽑는다. 비록 은퇴했지만 '기도하며 일하며 읽어라(Ora, Labora et Lege)'는 베네딕도의 영성 전통은 여전히 그의 삶의 전부다. 이젠 수도생활과 기도에만 오롯이 전념한다.

 수녀원 접견실에서 만난 벨트비나 수녀와의 인터뷰는 시종 즐거웠다. 들려주는 에피소드마다 폭소가 터졌다. 워낙 고령이어서 기억이 또렷하지 못했고,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했지만 삶을, 심지어는 북한에서의 혹독했던 수감과 강제노동, 추위, 배고픔, 수도가족들 순교까지도 하느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수도자다웠다.

 "함흥 인민교화소 감방 넓이는 가로 1m, 세로 3m 정도였는데 음식이 기가 막혔지요. 갖가지 잡곡을 섞은 밥 덩어리와 소금물에 배춧잎이 떠 있는 국이 전부였어요. 두 달 넘게 감방에 있으면서도 고기라고는 작은 생선 토막을 두 번 먹은 것뿐이었죠. 국을 담아오던 양동이는 새벽에 일어나 청소할 때 걸레를 빨던 양동이를 대충 씻은 것이었어요. 걸레는 너무나 낡고 더러워 바닥이 잘 닦여지지 않았지요. 뿐만 아니라 이나 벼룩, 빈대 등이 득실거려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나무로 만든 변기통은 대개 두 주간에 한 번씩 비워주었어요. 우린 간수들이 변기통을 비워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연옥과도 같은 고통이었지요."

 57일간 원산ㆍ함흥 임시교화소와 인민교화소에서 산 벨트비나 수녀 등 4명은 그해 7월 10일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된다. 이송에 앞서 수도복과 머릿수건, 소지품 등을 모두 빼앗기고 속옷과 속치마만 걸친 채 끌려간 네 수도자는 굶주리고 탈진한 모습으로 수감됐지만 겔트루드 원장수녀 등 수녀들 16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벨트비나 수녀는 증언한다.

 "새벽녘 옆방에서 벽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우린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간수에게 다른 수녀님들이 계신지 물어봤지만 도무지 대답을 해주지 않았죠. 나중에야 들었는데, 원장수녀님이 평양교화소장에게 면회를 신청했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 평양교화소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감방 죄수들이 모두 잠든 밤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울지도, 소리 내 말하기도 힘든 처지인지라 우린 얼마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훗날 우린 이때를 '귀신의 시간'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몰골이 꼭 귀신과 같았고 아무도 모르게 이뤄진 만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 함흥교화소 수감 생활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지극한 인내로 견디며 바친 기도는 간절했다.

 "주님! 당신 뜻대로 모든 것을 다 받겠나이다. 어여삐 여기소서!"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1949년 8월 5일 평양교화소를 출발한 성직자와 수도자(당시 유죄선고를 받은 독일인 선교사 8명과 한국인 신부 6명은 피살) 59명은 험준한 자강도 산골짜기로 옮겨진다. 그래도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도 시간전례(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궁핍과 고통을 견뎠다. 보위부원들이 덕원에서 가져온 옥수수ㆍ쌀자루에 섞인 밀알을 정성스럽게 골라 밀밭을 일궈 수확한 밀가루로 제병을 만들었고, 미사주는 산에 있는 머루를 따다가 술을 만들어 사용했다. 매일 봉헌된 미사 성제는 수용소 생활을 참고 견디게 해준 하느님 섭리이자 손길이었다.

 옥사덕수용소에서 가장 힘겨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뜻밖에도 '호미질'이었다고 고백했다. 1937년 6월 21일 수련자로 한국에 들어와 이듬해 6월 29일 첫서원을 한 뒤 수련자 양성과 선교에만 매달린 벨트비나 수녀에게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 밭을 매는 호미질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늘 서서 일하는 유럽인에게 쪼그려 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여름이면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하고 겨울이면 숯을 굽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일거리도 '배정' 받았다. 수녀들에겐 주방 일과 가축 사육, 농장 일 등이 주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일을 강요당하고 움막을 개조하고 외양간을 고쳐 지었다. 매일같이 옥수수와 콩을 갈아 먹어야 했다. 때로는 몇 주일간 무우국과 무우 시래기, 오이죽이나 오이 나물을 계속 먹어야 했다. 인민군이나 내무서원 같은 감시인들이 산나물을 캐 먹는 걸 보고 따라하고, 숲에 일하러 가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으면 행운이었다. 죄수복처럼 푸른 작업복을 한 벌씩 나눠줬지만 이것으로는 추위를 견딜 수 없기에 인민군들이 버린 옷을 주워다가 잿물로 빨아 해진 곳을 기워 입었다.

 "옥사덕ㆍ관문리 수용소에서 수도가족을 열 일곱 분이나 잃어야 했지요. 치명이나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당한 수도가족들 시신마저 제대로 안장하지 못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벨트비나 수녀는 참혹했던 기억을 손자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매사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품이 시련을 '해피엔딩 스토리'로 바꿔 놓은 듯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열심히 찾았는지, 서로서로 얼마나 아끼며 사랑했는지 몰라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옥사덕수용소에서 살았던 시기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축복의 시간이었지요."

 독일 뷔르츠부르크교구 슈바인푸르트 인근 타일하임 출신으로 1936년 입회한 벨트비나 수녀는 올해 수도서원 72주년을 맞는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됐다가 1958년 한국에 공동체가 복원됐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와 대구수녀원에서 주로 양성을 담당했으며, 최근까지도 수녀원 역사 정리와 독일 은인 관리 업무를 맡기도 했다. 평생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살던 언니 브리기다 체사르(Brigida Caesare) 수녀는 지난해 5월 97살을 일기로 선종해 외로울 법도 한데 노수녀는 여전히 밝다.

 지금은 후배 수녀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삶의 아름다운 황혼을 누리는 벨트비나 수녀는 "수녀로 서원한 것도, 수녀로 산 것도 한국에서였다"며 "그런 의미에서 독일산(Made in Germany)이 아니라 한국산(Made in Korea)이니 한국 사람으로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환하게 웃는다. 

 한 삶 신앙과 선행 실천으로 허리를 묶고 성경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걸은 노수녀의 밝고 아름다운 미소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하느님 나라로 부르시는 날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황혼에 젖는 해거름 수도원을 걸어 내려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드디어 독일로 귀국한 독일 성직자 가족, 수녀들이 입은 옷들은 북한이 귀국 전 양재 기술자를 시켜서 만들어 준 것으로 5년 가까운 강제 노동에 대한 유일한 노임이다.  뒷줄 오른 쪽에서 두번째가 벨트비나 수녀님이다.

강제 노동소 수형 생활중 손으로 짠 자켓. 그 부족한 재료로도 맵시를 낸 것이 신기하다.

박 루시아 수녀                             헌신자 장 앙녜따

에바 슈츠 수녀                      푸룩토사 게르트마이어 수녀

평화신문 2013년 5월 26일자 제1217호부터 시작한 ‘덕원의 순교자’의 연재를 끝맺는다. 이 기획은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의 권고에 따라 한국교회 신자들이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를 널리 알리고 이들의 현양 운동을 교회 안에 확산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덕원의 순교자’를 끝맺으면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를 통해 하느님의 종 38위 시복 경과와 그 의미를 들어보았다.



- 덕원의 순교자 시복 의미와 재판 경과가 궁금합니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재판은 20세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건이란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첫 시복재판은 2009년 12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성당에서 개정된 이후 12차례 예비심사 회기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회기 과정에서 16명에게서 목격자 증언을 청취했고, 시성성으로부터 시복재판에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역사위원회 최종 보고와 예비심사 보고서 작성에 관한 두 차례 회기가 남아 있으며, 이 회기가 마무리되면 가능한 한 올해 안으로 재판 기록을 시성성에 보고하려 합니다.

이에 앞서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두 해 앞둔 2007년 5월 10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덕원의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했습니다. 여기에는 2007년 2월에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평의회 권고와 같은 해 봄에 열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회의 격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시대 최근 연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고 호소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 하느님의 종 38위에 대해 그동안 신문에서 연재했습니다만, 이분들은 어떤 분들인지요.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정치 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란 이유만으로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순교자들입니다. 북녘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 6·25전쟁을 전후해(1949~1952) 공산주의자 손에 적잖이 희생됐습니다. 

이 가운데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연길수도원·원산수녀원 소속 수도자들과 함흥대목구·연길대목구 소속 사제들이 포함돼 있는데, 이분들이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입니다. 이 가운데는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가 13명이고, 독일인 사제와 수도자가 25명입니다. 교계 직분으로 좀 더 세분하면 주교 1명, 성직수사 14명, 덕원·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고 연길교구 사제 2명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입니다. 

또 이들 38위 순교자 중 23명은 평양인민교화소와 자강도 만포 관문리수용소 등지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고, 13명은 옥사덕 수용소에서 영양실조 등으로 굶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한윤승(필립보)·신윤철(베드로)신부는 해주인민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근처 바닷가에서 생매장됐습니다.

주요 인물로는 초대 원산교구장이며 덕원 수도원장이었던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덕원 수도원 출신 첫 한국인 사제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그리고 고 구상 시인의 형인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등이 있습니다. 또 루치우스 로트 덕원수도원장 신부는 교황 비오 12세가 독일 주재 교황대사로 있을 때 대사 비서로 일했고,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한국어 신약성경을 번역 출간해 성경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백작 가문의 카누트 다베르나스 신부는 ‘두메 본당 신부’로 희생적 삶을 산 수도자였습니다. 또 김종수(베르나르도) 신부는 한국인 첫 수련장 수사였고, 성 남종삼(요한)의 후손인 부산 출신 김동철(마르코) 신부는 월남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기 본당을 버리지 않고 신자들과 함께 있다가 체포돼 순교했습니다.”



- 덕원의 순교자들이 조선 시대 순교자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20세기 순교자로서 덕원의 순교자들이 지니는 각별한 의미는 이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대로 덕원의 순교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 현대사의 일부이며, 그들의 순교 사건은 한민족의 비극과 별개가 아닙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들의 순교 행적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이가 가슴에 품고 공경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덕원의 순교자들은 수도 공동체의 형제적 친교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조선 왕조시대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려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용덕’을 증거했다면, 덕원의 순교자들은 오랜 강제수용소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 즉 ‘애덕’과 ‘형제애’를 증거했습니다. 수용소 안팎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나누는 과정에서 한국인 독일인, 성직자 수도자를 떠나 형제애를 실천한 것이 더 중요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또 갇힌 형제들이 악조건 속에서도 서로 돌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 격려하고 애쓴 면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이전의 순교자들이 고신 극기와 영웅적 덕행으로 신앙을 증거했다면, 덕원의 순교자는 강제 노역의 일상에서도 형제애와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사랑의 순교’ 측면이 더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시성성 장관의 권고대로 시복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현양사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덕원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38위는 남북한교회를 연결하는 촉매제요 고리입니다. 이들에 대한 평가와 현양은 이념보다는 사랑과 인도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모원인 상트 오틸리엔수도원과 순교자들의 출신 본당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복과 현양 운동이 있었습니다. 왜관수도원에서도 음악회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이들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 수도원 성당 벽면에 이들을 위한 기도와 현양 공간도 꾸미고 있습니다. 또 8월 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릴 ‘동소문별곡’ 전에 덕원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할 계획입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 특히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우리 수도회 형제들에게 전이되지 않고 그들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는 점이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덕원의 순교자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북한과 북한 침묵의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인도적 지원이 확대될수록 덕원 순교자들의 현양도 확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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