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월남한 한국 수녀 13명은

 

1950년 12월 9일부터 부산지역에서 모여 수도생활을 하다가,

 

1951년 10월 20일 대구 대교구 최덕홍 주교의 도움으로 남산동 주교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피난생활 2년 만에 공평동에 100여평의 토지를 내입하여 작은 수녀원을 마련했다.

 

1955년 대구시 동구 신암동에 수녀원을 건축하고 6월에 신암동 분원을 설립했다.

 

1955년 11월 옥사덕 강제 수용소에서 독일로 송환 되었던 독일과 외국 수녀들도 거의 모두            

                     남한으로 재입국하여 한국 수녀들과 같이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지원자도 받기 시작하였다.

 

1956년 7월 29일 대구 수녀원은 프리오랏으로 승격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초대 원장으로 임명

 

1958년 12월 4명의 수녀가 서원

 

1966년 11월 '재단법인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란 명칭으로 재단설립

 

1987년  287명의 수녀가 병원, 학교, 본당 사목을 하며 경상도 지역만 14개의 분원이 있었고                                            서울지역에 10개의 분원이 있었다. 

원산 수녀원의 마지막과 수녀들 피납 

 

 

수녀가족은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종교 탄압으로 수도원과 분원가족들은 속속이 본당이 문을 닫고 쫒기게 되고  8월 원산 수녀원 건물이 징발된 후 다른 곳으로 옮겨다니며 숨거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옷을 만들어 준다거나 살길을 찾기 위해 피아노 교습이나 세탁, 의료를 행해야 했다.

 

수련소의 식구들은 신변 보호가 어렵게 되어 그대로 본가로 돌려 보내졌고

 

툿찡 모원도 히틀러 독재의 수녀원 몰수로 연락이 1945-1947년 까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선교의 의지는 그 당시 상황의 요구에 따라 양로원을 통하여 거지와 병든 노인들을 돌보는 자선을 펼치고 흥남에 분원을 설립하는 등 선교의지를 불태웟다.  

 

1948년 5월 20일 / 구 대준   신부의 초청으로  흥남 본당 분원 을 시작, 학원의 교실을 막아 쓰는 수녀원을 사용하며 선교의 의지를 불태웠다. 분원장 최 리오바 수녀, 해성학원의 교사 윤 마우라 수녀가 첫 공동체였으나 해성학원이 어려워지자 본원으로 돌아가고 오 이멜다 수녀가 선교 수녀로 오고 뒤이어 오 알퐁사 수녀가 부임했다. 1949년 5월 14일 공산당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어 선교는 1년 정도 되었다.

 

1948년  / 스위스의 임시 총원은 겔뚜르드 링크 수녀를 암브로시아 수녀에 이어 4대 원장으로 임명하였고

 

후에 이 겔투르드 수녀는 운명에 따라 지옥의 수용소에서 수녀들을 이끌고 감싸고 돕는 대표가 된다.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일제하에서도 없던 만행이 시작되었다. 여러 시설이 강제 징발로 빼앗겼다. 그들은 함흥 수도원을 접수하고 그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가 교황청의 개입으로 다시 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과 조선 수녀들은 난행을 일삼는 소련병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소련군은 1948년 11월 철수하였다. 그러나 재난의 비극은 다음 해에 몰아 닥쳤다.

 

1949년 5월 9일 밤. / 함경남도 보위부장 김석형의 지휘로

                                  함경남북도 일대의 전 수도원과 수녀원이 일제히 습격을 받아

                                  체포와 구금의 선풍이 불었다. 모든 종교인은 종교 시설에서 추방 되었다.

                                  그리고 전 시설이 폐쇄 되고 압수 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새벽, / 한국인 수녀가족는 원산 임시교화소로,(명단에 18명)  

                                      서양인 수녀가족은 평양 인민교화소로 호송되었다.

                                      5월 14일 함흥분원에서 네명의 서양인 수녀가족이 함흥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1949년 7월 2일 / 20명의 서양인 수녀가족이 모두 평양 인민 교화로 이송되어 재회하였다. 

 

 

                                                   하느님의 종 38위  참고 - 클릭

 

 

1949년 8월 5일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8명의 독일인 선교사들과 6명의 한국인 신부들을 제외한 모두을  옥사독으로 이송시켰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한국인 수녀 가족은 대개 개인 별로 고통을 겪었다. 대개

1) 본가가 남한인 수녀들의 경우,

2) 고향이 북한이지만 가족들이 월남하여 갈 곳이 없는 수녀들,

3)북한이 고향이면서 가족이 북한에 있어 아직 갈곳이 있는 경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의 경우는 이 보니파시아, 오 이멜다, 제 후밀리타스, 허 안젤라 수녀등 네명이었다. 허 안젤라 수녀를 제외하고 월남에 성공하였다.      

   

                     수녀님들의 생생한 증언을 이글의 원천이 된 원산 수녀원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산 수녀원 초기 정착 주요 사건

 

- 1925년 9월 24일 / 툿찡 모원에서 4명의 수녀들  파견 3개월의 항해하여 부산도착

                                  신보니파시오 주교가  초정하고 영접함

                                            sr.마틸다 히르쉬 (Matilde Hirsch) / 수련장 겸 분원장  

                                                         - 후에 4 대 총장이됨 1933~1947

                                            sr.크리스토마 슈미트 (Chrysostoma Schmidt) / 학교 설립 후 교장

                                            sr.다니엘라 비크러 (Daniela Kirchbichler) / 간호, 요리

                                            sr.헤르메티스 크로흐(Hermetis Groh) /  재봉, 수예

                                  / 당시 서울인구30만

         최초의 수녀원이 된 '성데레사의 집'에서 신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도움과 원산 거주 독일인의 도움을 받음

                                수녀원 옆에 후에 명명된 '마리아의 도움'이라는 시약소를 열어  헤르메티스 수녀님은  

                               생약 조제법등을 덕원수도원에서 배워 시약과 무료진료를 시작.

- 1925년 12월 말   / 한국인 첫 지원자 한 요한나와 임 골롬바가 입회

- 1926녀 2월 10일 / 크리스토마 슈미트 수녀의 종신서원식에

                                 초청받은 중국의 자선사업가이며 독실한 신자였던  루 빼홍의 축하선물로써 

                                 원산 수녀원 건축 재료비 일체를 부담하기로 함

- 1926년 3월 24일 /  덕원 수도원의 카에탄 피이르하우스 (Kajetan Vierhaus)신부가 수녀원 건축을 준비함

- 1926년 10월 말   / 툿찡에서2차 파견  3명의 수녀 파견 푸룩토우사 게르스트 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에와 슈츠(Eva Schuetz), 이센가르드 그라프 (Isengard Graf)수녀

- 1927년 5월 6일   / 3차  3명의 수녀 파견 코로나타 도쩰(Colonata Dotzel),                                                                                            세게벨타 람슬(Sigeberta Ramsl), 메르체데스 샤프 (Mercedes Scharpf)수녀

- 1927년 4월 29일 / 포교 성성으로 부터 원산 수녀원 설립과 수련원 설립 인준

- 1927년 6월          / 원산 수녀원 낙성식, 축성하고 '성 임마꿀라따 수녀원'으로 명명 - 지하 1층, 지상 3층

- 1927년 6월 6일   / 원산 수녀원이 정식 '프리오랏'으로 승격 / 초대원장 마틸데 히르쉬 수녀 임명

- 1928년                / 독일 수녀들의 기후병등으로 모원으로 치료차 떠나고 4차 파견                    

                                            sr.오트마라 암만 (Otmara Ammann)

                                            sr.플라미나 리히팅게르(Flamina Lichtinger)  

                                            sr.에메릭 게르딩 (Emmerick Gerding) 

- 1929년 6월 21일 / 5차로  일손을 덜어 주기 위해 마닐라에서 일하던

                                            sr. 디아틸디스 프랑코(Thiathildis Frank) 파견 

- 1930년 5월 24일 / 한국 지원자의 첫 서원식   sr. 임 마리아  sr. 백 베네딕다  sr. 아가비타

                                                                  sr. 리오바  sr. 멕틸디스  sr. 임마꿀라따

 

1933년 11월 1일 / 6차 파견 으로  2대 원산 수녀원장으로 후베르타 일그 수녀가 Sr. 왈브르그,

          sr. 베르니타 베르글러  그리고 청원자 크리스티나 링크 (후에 겔뚜르드 링크 원장->총장) 6차로 한국 입국

 

1933년 12월 2일 / 7차 파견 sr.암브로시아 엥글러, sr. 라이트라우드 도착

 

1937년 6월 21일 / 8차 파견 수련수녀 3명  sr. 벨트비나 체사르, sr. 디오메데스 메펠트, sr. 에나타 메츠게르

 

1938년 6월 21일 / 9차 파견 sr. 옵타다, sr. 리바니아 슈트라이프, 청원자 루이스 호펜치스 (후에 까리따스 수녀) 도착

 

1938년 10월 7일 / 첫 원장수녀였던 4대 총장 마틸데 히르쉬 수녀가 두번째 공식 방문

 

1939년 8월  / 암브로시아 수녀 3대 원장 취임

 

1940년 9월 29일 / 10차 파견 sr.프리텔마 그림, sr. 익냐시아 부끌레, sr. 아프라 바르틀 ,

           수련자 셀바 스피츨라이가 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전쟁의 소용돌이 사복차림으로 시베리아를 경유 도착.

 

1940년 12월 12일 / 11차 파견 sr. 아르싸시아 아이그네르, sr. 힐말카 쿠쓰만 (다음해 봄 마닐라 행)

 

1941년 12월 8일 / 태평양 전쟁 발발.

 

1930년 ~ 1940 / 선교 파견되어 일하던 몇몇 독일 수녀님들은 감기와 폐결핵, 늑막염등으로 치료차 귀국하거나 선종하였고 한국인 수녀로서  처음1938년 6월 18일 김요세파  수녀가 28세로 원산본원에서 폐결핵으로 선종하였다. 

마틸데 원장수녀는 병균이 뇌까지 침입하여 사경을 헤매는 에메릭 수녀에게 '에메릭 수녀님, 수녀님은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죽을 허락을 주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에메릭 수녀는 의식이 사경을 헤매며 의식이 몽롱한 중에도 '네'하고 놀랍게 또렸이 대답하였고 이 후 차차 회복되어 죽음의 위험에서 소생되었다.

 

수녀원의 기초 확립과 성장 -

 

예비수녀들은 입회 후 약 6 개월 동안 라틴어를 배워

                                                                 서원 수녀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라틴어로 능숙히 할 수 있었다 

 

1927년 ~ 1934년 원산 본당의 루치우스 로트 (Lucius Roth)신부가 수녀원의 고백신부로서 성사를 주었다.

1934년 봄 카누토 다페르나스(Canutus d'Avernas) 정식 수녀원 지도신부로 부임.

 

1931년 5월 25일 / 원산 수녀원 성당에서 신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주례로 첫 한국인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 6명이 탄생하였다.  sr. 임 마리아  sr. 백 베네딕다  sr. 아가비타   sr. 리오바  sr. 멕틸디스  sr. 임마꿀라따

 

1931년 10월 /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우리 회의 회헌에 따라 초대 원산 수녀원 원장(당시 `10년직)을

                                          하던 중 피선된   3대  총장 클로신데스 뤼켄 수녀 원산 수녀원 첫 공식 방문

 

1934년 5월 26일 / 한국에서의 첫 종신서원 7명  /  sr. 라인트라우드 (독일인)과 `1931년 첫서원을 한 6명의 한국 수녀들이 한국에서 첫 종신서원을 발하였도 독일인 청원자 크리스티나 링크가 겔뚜르트 링크라는 수도명으로 착복하였다. 불어,독일어, 한국어 3개국어로 낭독하였다. 홍 루치우스 원장신부가 주례를 대행했다.

 

 

수녀원 분원들

 

1933년 3월 19일 / 마틸데 원장 수녀는 고산  본당에 예속되지 않은 수녀원 분원 설립을 위해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은인들의 희사금을 모아 대지, 논, 밭을 포함한 신고산 분원을 설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어 첫 분원이 설립되었다. 온전한 모습의 독립적 수녀원으로써 모습을 갖추고 분원장 에와 수녀, 에메릭 수녀, 양 플라치다 수련수녀, 실습 나온 지원가 한 가족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었다. 유치원, 본당 교리등의 일과 수녀원 텃밭 끝에 시약소를 차려 '마리아의 도움'에 속해져 인가를 받은 후 의사인 디오메데스 수녀가 매월 한 번씩 다녀갔다. 1933년 4월 유치원 개원.

 

1936년 10월 20일 / 함흥교구의 가장 북방의 전교지인 회령본당 분원은 원산에서 기차로 10시간이나 걸려 본원과의 연락이 어려웠으나 분원장 다니엘라 수녀, 주방과 집안 일 책임 박 아가비타 수녀, 본당전교를 맡은 최 리오바 수녀 그리고 명악학교 선생 윤 마우라수녀가 공동체를 이루었고 시약소를 개설하여 최 리오바 수녀가 맡아 활동하였다. 주변의 시기로 무면허 시약소 고발을 당하여 문을 닫고 열고를 반복하였다.

 

1940년 7월 22일 / 함경 북도 청진시의 청진 본당 분원은 빈민학교 교사와 전교활동 그리고 시약소를 운영하며 겔뚜르드 분원장, 옵타다 수녀 그리고 사베라 수녀가 공동체를 이루었다. 청진은 해안을 기고 있는 곳이라 수녀원으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고  열악한 수녀원 환경 중에도 옵타다 수녀는 허름한 집관리와 식생활 해결까지 분원장의 몫이었다

 

1941년        /  1926년 시작된 함흥 본당은 1941년  본당 설립과 함께  시작한 분원에서  '성심의원'을 운영원하였다.  성심 의원장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헌신적이고 능력있는 독일 의사로 명성이 자자하여 하루 60-80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왕진다니다 1944년 폐렴으로 3개월간 자리에 누웠다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원산을 거쳐 신고산 약방까지 두 시약소를 매월 1회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면서도 치료받지 못하고 병사하는 사람들로 늘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에나타 수녀가 간호원으로 오 말가리타 수녀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원산 수녀원 역사

한국 천주 교회사 간략 참조 - 여기 클릭 

 

-1910년 8월 일제 한일병합하며 조선통감부 -> 조선총독부

-1910 조선총독부 교회 회유정책으로 신앙의 자유 공언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선교를 통제

 

-1920년 원산 대목구  설정 - 신보니파시오 신부 초대 대목으로 임명 -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

                                                   함경남북도와 간도를 포함

                                                   한국인 3/4  일본인 1/4 - 함경남도 전체 1,227,060중에 교인 600명

                                                                                                함경북도 전체   518,060중에 교인 40명

                                                    그 이전 부터 개신교는 활발하게 성공적으로 선교하고 있었음

-1925년 4월 조선 공산당 창립

 

-1938년 3월 일제는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한국어를 말살 시키려 함.

 

 

직접선교 

 

- 1924년  12월 24일  / 원산 본당에서 수녀들의 교리지도를 받아 첫 4명의 예비자가 영세를 받다.

- 1926년 3월  크리소스토마 수녀가 다니엘라 수녀와 지원자 1명 동행하여 '지경'이란 곳으로 공소방문 그 후

   1929년 봄에는 '볼미'로 에바수녀가 '지경'으로 주일마다 세게벨타 수녀와 청원자 임 아가다가 선교를 나간다.

 

    1930년까지  4년의 기간동안 극심한 선교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선교의 노력을 한다.

     -교리가르치고 세례 65명,

    - 호수천신학교 주간여학생 72명, 야간 여학생 80명 교육

    - 학생을 주로한 예비자  370여명

    - 시약소 치료자와 방문 치료자 1만여명

    - 환자방문후 대세자 650명 

 

일반인 교리

초창기에는 원산 본당에서 가정 방문을 다니며 교리를 가르쳤으나 1931년 부터는 예비자들을 수녀원으로 오라고 하여 가르쳤다. '성 데레사의 집' 교리실로 하여 본원에서 가르치고 '성교 요리 문답'의 유일한 교리서를 사용하다가 '1934년 '천주교 요리 문답'이 간행되었다 대개는 독일인 수녀가 교리를 가르쳤지만 늘 한국인 수녀나 예비수녀가 보충하여 설명하였다. 6개월동안 매일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 12단과 교리 문답 320 조목을 모두 암기해야 했다. 노인을 위한 76문답이 있었는데 당시 문맹이 많아 구술하여 암기하도록 하였다.

원산에는 신자가 별로 없었고 공산당이 있어서 영세할 이들의 처지는 아주 어려웠고 새로 영세자가 탄생하여도 기쁜 마음으로 신자가 될 수는 없었다. 공산당은 처음 원산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선교 활동을 방해하였다.

 

 

'호수천신학교'

- 1927년 / 수녀원이 성 임마꿀라따 수녀원으로 이전하자 이전의 성 데레사의 집과 마당에서 교리지도를 시작, 문맹퇴치를 하며 학생이 100명이 넘어서자 초기의 해성학교 건물 옆 초가집의 방 하나를 교실로 빌려 쓰다 다시 400명이 넘어선다. 아이들의 열성에 마음이 감도한 크리소스토마 수녀는 각계 각층에 인사에게 도움을 요청.

- 1926년 9월 1일  / 이렇게 '호수천신학교'를  해성 보통학교 입학도 어려운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며 양성화하여 학생을 모집하였다.

- 1938년 / 성데레사의 집 아래층을 모두 인수하였고 크리소스토마 수녀는 열성적으로  초등학교과정과  교리를 가르쳤고 35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오전, 오후로 나뉘어 공부 하였다.

- 1941년 / 정식 초등학교 인가를 받았다. 당시 혜택을 적게 받던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늘 더 많았으며 입학을 원하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고 1941년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와 사베라 수녀, 지원자 한명이 함께 일하였다.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

- 1925년 수녀들이 원산에 도착한 지 한 주간도 되지 않아 주민들의 치료 요청에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효과를 많이 보자 헤르메티스 수녀가 통역을 대동하여 11월 한국 도착한 후 12월 부터 곳곳으로 다니며 병을 치료해 주고 약초를 찾았다. 수녀님은 치료를 해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대세를 주는등의 봉사를 하다가 일약 명의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시약소는 성 데레사의 집 부엌의 한편이었으며  후에 이 건물이 헐리자 지하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폐결핵이 악화되어 한국을 떠났다가 1928년 1월 12일 별세했다. 이 후 시약소에는 26년에 입국한 약사 프룩투오사 수녀가 헤르티메스 수녀를 돕다가 홀로 맡아 운영하고 28년 입국한 오트마라 수녀님이 도와 일하였다.

신 보니파시오 신부님께서 1929년 5칸의 집을 사 주어 시약소로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었고 이 때 부터 '마리아의 도움'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느라 한국어를 배울 시간도 갖지 못했으나 중환자들도 그저 수녀님께 치료 받기를 원해 다른 병원을 찾지 않고 수녀님은 특히 어린 아이들을 깊은 애정으로 돌보았다. 시약소는 실제로는 '무료진료소'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업이었다.

 

 

해성학교 (일명 명악학교)

- 1921년 5월 / 원산에서 본당에 부임한 덕원의 옥 에크하르트 신부가 야학 강습소로 개설하여 1922년 3월 4년제 해성 보통학교로 승격, 1926년 4월 6년제로 연장. 1928년 15학급의 학생 689명, 교사 17명. 오 병주 선생은 학교 행정 처리를 하며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비서로 수도원의 행정 처리도 담당하였다.덕원 수도원에서는 운영하는 모든 본당에서 초등교육기관을 중요 선교수단으로 설치하였었다.

-1926년 크리소스토마 수녀 해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봉사하며 학생들의 음악 행사를 통해 원산 전역에서 해성학교가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수녀들이 파견되어 교리등을 가르치거나 정식 교사로 윤 마우라 수녀가 교사로 봉직.

-1935년  3월 일본인 학교가 있었으나  한국 어린이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모아서 4년간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간단한 계산법도 지도, 

- 1940년 2월 11일 /  일제 창씨개명 실시  1941년 한국어 학습을 완전히 폐지시킴.

 

해성 유치원

원산 수녀원에서 직영하였다. 한국말에 능한 에바수녀가 통역을 하며 선교 파견 수녀들은 유치원을 설립하여 구 해성학교 건물에서 1927년 4월 개원하였다.

그래서 '성 데레사의 집'에서는 비교적 부유한 집 자녀들이 다니는 해성 유치원과 가난하여 진학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한 호수천신학교가 함께 있었다.

유치원의 교육비는 무료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원했지만 100으로 제한 되었고 수녀와 예비수녀가 교사로 짜여졌었다.

1933년 언어소통 때문에 김 데레사 수녀가 책임자로 유치원 운영

1938년 새로 지은 2층 건물로 이전, 아래층은 운동기구, 놀이기구, 2층 일부 부인 예비자 교리실로 이용.

1941년 200명 정도 수용하였음.

 

청각 장애자 교리

원산본당에서 크리소스토마 수녀가 1930년 교육혜택을 받지 못하는 열심한 신자 가정의 장애아를 처음 지도하였고 다음에 일본인 막달레나 수녀 그리고 이 후 까리따스 호펜지쯔 수녀가 청각 장애자 교리 지도를 여러 어려움에도 계속하였고 전후 대구에서 그리고 다시 서울 수녀원에서 활발하게 청각 장애인을 위한 교리, 교육과 복지 기초를 다질 씨가 뿌려졌다.

 

 

1945년     /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 1947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1948년 2월 '조선 인민군' 창설, 

1945년 조국의 해방되자 공산당은 반종교 투쟁을 강화시켜 나갔고 종교 말살을 목적으로 종교단체 탄압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9일 / 김일성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하고 인민재판식의 청산 형태로 탄압.

 

북녘 본당 갖기 참조

 

고산본당▲소속 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립연도: 1930년 ▲옛 주소: 함경남도 안변군 고산읍 ▲현 주소: 함경남도 안변군 고산읍 ▲초대 주임: 르메르 신부(1887) ▲마지막 주임: 제12대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1939) 고산본당은 덕원자치수도원구 소속 본당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고산읍에 위치해 있었다. 1896년 함남 안변군 위익면 내평리에 설립된 내평본당의 후신으로 세워져 안변군과 강원도 평강·회양·강릉 일부까지도 관할했다. 본당 설립 당시 신자 수는 1000여 명이었다. 전신인 내평본당이 고산역 부근으로 이전되면서 본당 명칭이 고산본당으로 바뀌었다. 1940년 고산본당은 덕원자치수도원구 관할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정권 수립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해 1949년 5월 본당 주임 오트 신부가 체포되고 본당의 모든 재산도 몰수당하고 말았다.

 

원산본당▲소속 교구: 덕원자치수도원구 ▲설립연도: 1887년 ▲옛 주소: 함경남도 원산시 ▲현 주소: 강원도 원산시 명석동 ▲초대 주임: 드게트 신부(1887~1889) ▲마지막 주임: 제14대 파비안 담 신부(1930~1940?) 원산본당은 1887년 7월에 설립돼 1949년 폐쇄됐다. 원산은 1880년 5월 개항해 인구가 집중된 신흥도시로 천주교도 이른 시기에 소개됐다. 1884년 원산공소가 설립될 당시 신자 수는 20명에 불과했지만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이듬해 7월 드게트 신부가 원산에 자리잡으면서 원산본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제11대 주임 에카르트 신부는 1921년 5월 본당 구내에 빈민아동 교육을 위한 강습소를 개설했고 이듬해 3월에는 4년제 남녀 보통학교인 해성학교로 발전했다. 1925년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이 진출해 본당 내에 야학과 시약소, 교리강습소 등을 운영했다. 그러나 원산본당 역시 해방 후 공산정권의 탄압을 받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며 폐쇄됐다. ‘

 

 회령본당▲1926년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咸鏡北道 會寧郡 會寧邑) 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함흥교구소속 본당. ▲주보는 성 야고보.▲ 1926년 히머(C. Hiemer, 林) 신부가 창설하였다. 1931년 5월 그라프(O. Graf, 金) 신부가 보좌로 부임했고, 이 해 11월 히머 신부도 영흥본당으로 전임되자 ▲그라프 신부가 2대 주임이 되어▲ 1933년 초등교육기관 명악학교를 개설하고 ▲1935년 성당을 건축하였다.▲ 1936년 포교 성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명악학교를 전담했고, ▲1938년 침머만(F. Zimmermann, 閔) 신부가 주임으로,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신부가 보좌로 부임하여 사목했으며, ▲파렌코프(W. Farrenkopf, 林) 신부가 침머만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하던 중 8.15광복 직후 소련군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결국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폐쇄되기 직전까지 회령본당 관내에는 13개의 공소가 있었다. 

 

 청진본당▲1926년 함경북도 청진시 포경동(咸鏡北道 淸津市 浦頃洞)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함흥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신(聖神). ▲바인거(M. Bainger, 方) 신부가 창설하였다.▲ 1935년 나남(羅南) 본당을 분할, 독립시키고▲ 1945년 바인거 신부가 병사하자 ▲한국인 이재철(李載喆, 베드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49년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 주교를 비롯하여 함흥과 덕원면속구의 성직자들이 북한 공산정권에게 체포되고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4일 이재철신부가 체포되고 성당을 포함한 교회재산이 몰수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폐쇄되기 전까지▲ 청진본당은 2개의 공소를 두고 관할했고 초등교육기관 해성학교를 운영하였다. 

 

  함흥본당▲1928년 함경남도 함흥시(咸鏡南道 咸興市)에 창설되어▲ 1949년 폐쇄된 함흥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보니파시오. 노이기르크(P. Neugirg, 兪)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성당을 건축하고 교세 신장에 중점을 두어 사목하였다. ▲1931년 영흥(永興)본당을 분할 독립시켰고, 2대 주임 코흘러(E. Kohler, 景) 신부 재임 때인▲ 1940년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동(同)회의 수녀들이 성심(聖心)의원을 개원하였다. 그러나 8.15 광복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 주교, 덕원 베네딕토수도원 원장 로트(L. Roth, 洪) 신부, 부원장 실라이허(A. Schleiher, 安) 신부, 덕원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 신부 등이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결국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폐쇄되기 직전까지 ▲함흥본당 관내에는 5개의 공소가 있었다. 

 

북녘 본당 갖기’ 운동 참여신청 02-753-0815 서울대교구 민화위

 

 

 덕원신학교 참조

 

수녀님들과 함께 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