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자 암라인 신부
영성과 초기역사


”내가 만일 라파엘로나 티찌아노 같은
천재성을 지니고
그들처럼 갈채를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단순한 한 사제가 되어
세례와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통해
단 한 아기라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또 천상 영광의 상속자로
만들 힘을 지닌
은총과 바꾸지 않겠다.
불멸의 영혼이 하느님을 닮게 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는것,
이것이야 말로 참 예술이며
가장 심원한 과학이다. ”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1844년 2월 4일 스위스 루체른시 군쯔빌(Katon Lucern, Gunzewil)에서 태어난
안드레아스 암라인신부는 어려서부터 선교사를 꿈꾸었다.
성 베네딕도의 정신과 생활을 존경하던
그는 1870년 독일 보이론(Beuron) 관상 베네딕도 수도원에사제 지망자로 입회하였다.
1872년 7월 16일 슈바르쯔발드(Schwarzwald)
성 베드로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12년동안꾸준한 인내 속에서 선교할 수 있기를 아빠스에게간청하였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선교 지방에서신앙을
전파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수도회를세우고자 했던
그는 교황 레오 13세에게 수도회의 인준과 강복을 받고
1884년 9월 24일 라이헨 바흐에 [선교 베네딕도회]를 창설했으며,
이 수도회를 ”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서,
만사에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세원진 집이라고 하였다.
그는 초창기 많은 어려움 중에서도 선교사들을 파견하는등,
수도회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하였으며,
1927년 12월 29일 쌍트 오틸리엔 대수도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창설한 수도회는 현재 독일 쌍트 오틸리엔(st. Ottilien)의
대아빠스좌 수도원과
다른3개의 아빠스좌 수도원을 포함해전세계
12개 대수도원으로 구성된 오틸리엔 연합과
하나의 독립적인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로 발전하였다.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님은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보이론 수도원에 입회하기전까지는 미술 공부를 하였다.
보이론 수도원에서 지낼 당시에도 많은 미술 작품들을 그렸으며,
수도원 건물 건축 디자인에도 그의 재능은 빛나게 나타났다.

중앙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초창기 오틸리엔 수도회 회원들

암라인 신부님이 그린 예수 성심상
암라인 신부는 이미 보이론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자신이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선교 열망에 대해서 수련장과 이야기를 한 바 있었다.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여 보이론의 수도승으로서 살면서도 끊임없이 선교 열망이 점점 커져가 보이론의 관상 생활에 깊이 침잠할 수 없었다.
보이론 수도원의 마오로 볼터(Maurus Wolter)4) 아빠스는 암라인 신부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온전히 수도 생활에 적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암라인 신부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자신의 선교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볼터 아빠스에게 지속적으로 청했다.
이때 암라인 신부는 수도 소명과 선교 소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라인 신부의 선교 열망은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거의 10년 동안 자신의 아빠스의 반대를 받았으나,
마침내 아빠스의 허락을 받아
1882년 2월, 런던 근처 밀힐(Mill Hill)6)에 있는 성 요셉 선교원(Missionshaus)을 방문하였다.
암라인 신부는 3월 16일부터 10월 28일까지 그곳에 머물며 밀힐의 창립자인 보건 주교를 만났다.
이때 그는 사제들을 도우며 교사로 활동할 ‘평신도 선교사를 위한 신학원’
(Institut für Laienmissionare)의 설립을 생각했다.
이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3월에서 11월까지 네델란드 슈타일(Steyl)에 머물었다.
그곳의 원장인 아놀드 얀센(Arnold Janssen) 신부와의 만남으로
암라인 신부의 계획은 진일보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평신도 선교사를 위한 신학원’ 설립 대신에 하나의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창립을 고려하게 되었다.
즉, 선교지에 평수사들을 충분히 가진 선교 수도원들을
설립하여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 얀센 신부가 보이론의 마오로 아빠스에게 보낸 추천장을 근거로
마침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8월 30일,
포교성성에 소속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는 수도 소명과 선교 소명 사이의 통합을 탐색하며
자신의 계획을 진척시켜 나갔다.
그 후 암라인 신부는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게오르그 뎅글러(Georg Dengler) 주교 대리와 만났다.
뎅글러 주교 대리는 교구 내 라이헨바흐라는 곳에
버려진 옛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을 암라인 신부에게 소개해 주었고,
암라인 신부는 계약을 체결하여 그 건물을 양도받았다.
마침내 암라인 신부는 1883년 12월 19일에 비공식적이지만
라이헨바흐에서 선교원을 출범시켰다.
그는 이제 국가와 교회의 인가를 받는 것이 필요하였다.
암라인 신부가 1884년 1월 6일 자신의 청원서를 레겐스부르크의 교구 사무국에 보내게 되었을 때,
교구장 세네스트레이(Ignaz von Senestrey, 1818~1906) 주교는
청원인에게 인증서를 수여하는데 사도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암라인 신부는 즉시 로마로 가서 자신의 청원서를 포교성성에 제출했다.
청원서에는 자신의 선교 계획 발전 과정에 대해서 보고하면서, 자신의 수도 서원 면제 청원을 하였다.
이어서 이미 사제직 지원자들과 수사 지원자들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며,
성소자들을 합당하게 교육을 시킨 후에 선교지에 파견하여
베네딕도회적인 방법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청원서 끝에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기초로 해서 작성된 지원자 교육 계획을 밝혔다.
마침내 교황 레오 13세는 1884년 6월 29일에 장차 성 베네딕도회 총연합 소속 13번째 연합회로 발전하게 될,
레이헨바흐의 선교원(Missionshaus)을 인가하였다.
이 날이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공식 창립일로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다.
암라인 신부는 국가로부터 인가를 받는 일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는 당시 ‘문화 투쟁’ 시기의 반수도원적인 법령하의 독일에서 수도원을 설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도원과 다른 형태의 것을 숙고해야 했다.
1883년 12월 4일, 바이에른 주 문화부 장관 요한네스 루츠(Johannes Lutz)11) 박사를 직접 찾아가,
교사 양성소를 포함한 선교 신학교의 인가에 대한 청원서와
〈외방 선교를 위한 독일의 신학교〉라는 제목이 붙여진 계획서를 제출했다.
국가의 인가에 직면하여 암라인 신부는 우선 수도원적인 형태 내지는 그와 유사한 모든 흔적을 피하여야 했다.
12월 7일, 암라인 신부는 장관으로부터 하나의 답변을 받았다.
보다 상세한 계획을 서술하고 정관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암라인 신부는 요청받은 상세한 계획서와 정관을 완성하여 1884년 1월 1일, 문화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문화부로부터는 오랫동안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암라인 신부는 1884년 12월 18일, 문화부에 제출한 그의 청원서를 새롭게 갱신하고 그것을 수정하였다.
그는 “신학교”(Seminar)라는 명칭을 포기했고, “지금도 이후에도 수도원은 아닐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청원서의 제출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경되어 ‘아프리카 내륙을 위한 독일 가톨릭 선교회’(Katholische Deutsche Missionsgesellschaft für Inner-Africa)라는 명칭 하에 하나의 협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885년 4월 11일, 바이에른 정부는 마침내 이 설립 계획을 승인하였다.
여기에는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마침내 라이헨바흐의 선교원은 교회와 국가의 승인 절차를 완료하고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의 일곱 가지 기본 사상
교황 레오 13세가 1884년 6월 29일에 인준한 성 오틸리엔 연합회 회헌의 기초가 된,
암라인 신부의 일곱 가지 기본 사상은
그가 신학 공부를 시작한 1867년 이후 17년 동안의 숙고와 연구로 이루어진 결실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축적된 창립자의 선교 계획은 종교사, 수도회사,
그리고 宣敎史 등에 관한 연구와 여러 국가에서 이루어졌던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에 관한 서면 보고의 섭렵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최초의 동기는 그가 1868년에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생으로서
들었던 카알 요제프 헤펠레(Karl Josef von Hefele)교수의 교회사 강의였다.
그가 영감을 받은 강의 내용은 수도회와 수도회 창립자들
특히, 성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의 기본 사상은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소명 의식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가 베네딕도 회원의 일원으로서
시대사적인 요구와 선교지 국가로부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또한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교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수도 성소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틀림없이 긍정적인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일곱 가지 기본 선교 사상의 구조
첫 번째 기본 사상은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전 세계 인구 중 절반 이상이 비신자인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이 베네딕도회의 오랜 선교 전통의 부활 가능성을 감지하고,
유럽(독일)에 선교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을 설립하여 그 중 하나를 모원으로 삼아
새로운 선교 베네딕도회 연합회 창립을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기본 사상은
전통적이고 성 베네딕도 규칙에 충실한 베네딕도회 선교 방식의 근본 원칙을 제시한다.
선교 지역에서 수도원 설립이 최우선의 과제이며,
수도원은 선교 지역의 은총의 중심지이자 복음화의 원천이며 선교사들의 안식처이다.
그리하여 선교 소명과 수도 소명이라는 이 이중 소명은 상호 보완하며 승화 작용을 한다.
세 번째 기본 사상은
수도원의 인원에 대해서 다룬다.
수도원의 인적 구성은 서원자(성직 수사와 평수사)와 수련자(성직 수사 지망 수련자와 평수사 수련자)와 수도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신학생과 수공업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구성된다.
성소 식별의 신중성과 수도원 내의 교육, 그리고 선교 활동의 어려움을 이겨낼 건강도 식별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네 번째 기본 사상은
선교 활동의 협력자로서 평수사 활동의 유용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선교 지역에서 성직 수사들이 할 수 없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성직 수사와 함께 평수사들을 파견하라고 지적한다.
다섯 번째 기본 사상은
성직 수사와 평수사와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신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형제로서 사는 것이 성 베네딕도회의 수도 규칙의 정신이다.
여섯 번째 기본 사상은
선교 활동의 협력자로서 선교 수녀들의 활동의 유용성을 언급한다.
효율적인 여성 선교를 위해서 선교 수녀들이 필요하다.
수녀원은 수도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해야 하며, 자기 회의 규율에 따라 총원장 수녀의 지도하에 살 것이다.
일곱 번째 기본 사상은
종합의 원칙으로 이 일곱 가지 사상의 권위에 대해서 논한다.
이 기본 사상은 취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토대이다.
따라서 청원서의 형태로 포교성성에 제출되어 심의 후 사도좌의 인준을 받게 되면,
연합회의 총회나 최고 입법 기관도 삭제 혹은 변경할 수 없고,
이를 무효화하는 법을 회헌에 넣을 수 없다.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의 선교 이념 교회의 공식적인 승인 후에도, 라이헨바흐의 선교원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암라인 신부와 레겐스부르크 교구장인 세네스트레이 주교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오틸리엔 수족의 역사에서 발췌
창립자 안드레아스 암라인(1844~1927) 신부는
1844년 2월 4일, 스위스 루체른 주 베로뮌스터(Beromünster) 인근 군쯔빌(Gunzwil)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루체른에서 김나지움을 다녔다.
1867년 성령강림 이후 사제직에 뜻을 두고, 루체른 대학교와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70년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Beuron) 수도원에 입회하여,
1871년 12월 25일 ‘안드레아스’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한 후 1872년 7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오틸리엔 대수도원
2012년 오틸리엔 대수도원 회원들

처음부터 주교는 암라인 신부와
그의 계획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주교는 라이헨바흐 선교원의 지원자들에게
서품을 줄 용의도 없었다.
암라인 신부는 레겐스부르크 교구를 벗어난
지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찾아야만 했다.
암라인 신부는 아우구스부르크 교구장
방그라시우스 폰 딩켈(Pankratius von Denkel) 주교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886년 11월 엠밍(Emming) 즉 지금의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곳에는 맹인들의 주보인 성녀 오틸리아 순례 경당이 있었는데,
이런 연유로 성 오틸리엔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때부터 암라인 신부는 자신의 주 거주지를 엠밍으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부터 공동체를 이끌었고,
엠밍-성 오틸리엔의 개조와 신축 활동을 주재했다.
마침내 독일 정부의 요청과 포교성성의 선교지 배정으로
신부 1명, 수사 9명, 수녀 4명으로 구성된 첫 선교 파견 그룹이
1887년 11월 11일 성 오틸리엔을 떠나 로마로 가서 서원을 하였다.
(로마에 베드로 대성전 가까이에 독일인 공동묘지가
이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들인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면으로
거룩한 장소로 여기 있는 경당이 우리 회에서
맨처음 아프리카로 파견된 4명의 수녀님들이 1887년 11월 21일
수도서원을 발한 곳임)
1888년 1월 말 동아프리카 독일령에 도착하여
항구 도시 다레스살라암(Dar-es-Salaam)에서
내륙으로 20㎞ 정도 지점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곳을 푸구(Pugu)라고 불렀다.
푸구에서의 생활은 아주 엄격하였다.
반년 만에 육체적 피로와 열대병으로
수사 1명과 수녀 1명이 죽었고,
다른 수녀들은 독일로 돌아가야만 했다.
1889년 1월 13일 아랍인들의 지도자인 부쉬리(Bushiri)가
독일 식민지 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부쉬리의 공격 대원들은 푸구를 습격하여 Petrus Michel수사,
Benedikt Kantwerg수사 2명과 Martha Wansing 수녀를 사살하였고,
푸구 수도원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암라인 신부는 큰 충격을 받고 상황 파악을 위해 생존자들을 모두 귀국시켰다.
첫 계획은 불과 14개월 만에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자 수도회는 더욱 유명해져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1889년 가을 암라인 신부는 보니파츠 플레슈츠(Bonifaz Fleschutz) 신부의 지도로 선발대를 잔지바에 파견하였다.
1890년 6월 9명의 수녀와 5명의 수사, 그리고 1명의 신부로 구성된 본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다레스살라암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1891년 1월 29일 보니파츠 신부가 흑수열병으로 2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반년 후에는 2명의 수사가 죽었으며, 선교사의 30~50%가 말라리아나 흑수열병을 앓고 있었다. 1891년 10월 21일 24세였던 프란치스 마이어(Francis Mayr) 신부가 사망했을 때 전 지목구 안에 3개월 전에 도착한 사베리오 바우만(Xavier Baumann) 신부 한 명밖에 없었다. 극심한 사제 부족 상황에서도 암라인 신부는 본 선교지에서 활동을 원하는 교구 신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시안 스피스(Cassian Spiss, 1866~1905) 신부가 1893년에, 마오로 하르트만(Maurus Hartmann, 1865~1905) 신부와 바실 페르스틀(Basil Ferstl) 신부가 1894년에 동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선교지의 상황도 많이 개선되었다.)



암라인 신부님이 그린 푸구에 세워진 수녀원
그 이후에 몇 년 간 이렇게 선교지에서 풍토병으로 선교를 간 수사,신부, 수녀를 잃으며 문제들이 더 해갔고
암라인 신부 자신이 새로운 수도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행정적 무능력의 문제도 함께 있었다.
암라인 신부에게 특히 그 오틸리엔 수족의 담당주교가 1896년 대수도원장 플라치두스 올터와 보이론 수도원에 “오틸리엔 수족을 정돈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 몹시 분개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일이 행해졌고
같은 해에 오틸리엔 수도자들이 장엄서원을 발하며
오틸리엔 수족은 베네딕틴 연합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1896년 1월 4일 암라인 신부가 총장직을 사임하면서
포교성성은 보이론 연합회 소속의 한 아빠스가
성 오틸리엔을 얼마동안 도와주도록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11월 30일 보이론 연합회 소속의
오스트리아 세카우 수도원의 일데폰스 쇼버
(Idefons Schober, 1849~1918) 아빠스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제2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보이론 총아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만한 업적과 거대한 건물과 훌륭한 작업 시설들을
우리 베네딕도회가 외부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쇼버 아빠스는
1902년 6월 28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큰 은인이다.
1904년 11월 22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은
성 오틸리엔 연합회로 세계 베네딕도 연합(Confoederatio Ordinis S. Benedicti)에
열세 번째 연합회로 가입하였다.
이로써 창립자 암라인 신부가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한
새로운 성 베네딕도회 연합회가 초기에 선교원으로
출범한 지 20년 후에 탄생하게 되었다.
1902년 12월 18일 초대 아빠스 선거에서 당시 부원장(Subprior)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는 1895년에 아우구스부르크 교구 소속의 새신부로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1896년 11월 1일에 유기 서원을 했다.
1903년 2월 아빠스 축복식을 가졌다.
베버 아빠스는 이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최고 장상이자,
1887년 이후 동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오틸리엔의 선교사들과
선교 활동을 책임진 총장이기도 했다.
그는 《온 세상으로 나가라》(Euntes in mundum universum)라는 제목으로
아프리카 선교 혁신 프로그램을 집필하였는데,
그동안의 선교 활동에 대한 회고와 의문이 저술 동기이다.
베버 아빠스는 아프리카 선교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1905년 동아프리카 선교지를 시찰하던 중에 그해 8월 중순에 일어난
아프리카인들의 민중 폭동(Maji-Maji-Aufstand)21)을
직접 목격한 후 2년간 숙고하여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