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1928년 원산 수녀원 식구들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성인 (480 – 547)은 6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을 첫자리에 두고 설립된
형제적 공동체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기도와 일을 조화롭게
번갈아 가며 고요한 생활 중에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로마 제국의 잿더미 속에서 무엇보다 하느님을 찾으며,
베네딕도 성인은 부지중에,
유럽의 고전적인 유산과 그리스도교 가치를 통합시키며
문명의 새 씨앗을 전 유럽에 퍼뜨리셨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 시대 다른 수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민족 복음화를 우선시 하는 데 뿌리 둔
수도회를 설립한 것이 아니며
성인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수도생활 원칙으로써, 그리고 삶의 유일한 목표로써
“Quaerere Deum”
즉, 하느님을 찾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깊은 관계로 들어가게 된 신앙인은
타협적인 윤리나 피상적인 신앙심이라는 깃발아래
미지근한 생활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빛 안에서,
우리는 베네딕도께서 성 치프리아노로 부터 발췌한
성규 4장 21절의 수도승의 삶: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것이니”
라고 요약하여 표현한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창립자 암라인 신부님의 시대는
많은 선교 수도회의 확장시기인 19세기-20세기에 속하는데
역시 이 시기 1884년 남독일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렇긴 해도 그분의 선교 성소는 특별한 것이었고
철의 정권하 있던 독일에서
새로운 선교 수도회를 일으키는 일은
많은 고통과 고군분투를 동반해야 했고
암라인 신부님은 처음 독일
보이론 대수도원에 입회하여
곧 그 수도자들이 선교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긴 고투 끝에야, 외국 선교를 위한 수도회를
설립할 허락을 성청으로 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우리 회는
초창기부터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며
동아프리카로 파견된
4명 마르타, 펠리치타스, 꼬르두라
그리고 왈부르가 수녀님이
자신들의 삶을 사랑으로 충만하여
함께 사는 수녀님들과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음이 알려지자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고
우리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짧은 삶을 살면서 크게 눈부시진 않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받친 많은 젊은 수녀님들도 있습니다.
1925년 북한 원산에
처음 4명 수녀들이 -
마틸다 히르쉬 (Matilde Hirsch) 수녀
크리스토마 슈미트 (Chrysostoma Schmidt) 수녀
다니엘라 비크러 (Daniela Kirchbichler) 수녀
헤르메티스 크로흐(Hermetis Groh) 수녀
독일 툿찡 모원에서 파견되어 빠르게 성장하는
수도원으로 발전되었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수녀원을 형제 수도원인
덕원 수도원과 함께 해산시키며
많은 독일 국적의 수도자들이
강제 수용소인 옥사독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고
중노동과 추위 그리고 병과 굶주림으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고
한국 수녀님들도 심한 감시와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때 돌아가신 38분들의
시복시성을 준비하고 있으며
독일 수녀님과 2분 -Sr. 에바 슈츠, Sr. 푸룩토사-
그리고 박 루시아 수녀와 헌신자 장 앙녜따 가
우리 수녀회에 속합니다.
해방과 함께 살아 남은 분들은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귀환하였으나,
그 중 많은 수녀님들이 다시 죽을 각오로
한국 땅으로 돌아오기 열망하여
대구 신암동에서 1952년
흩어졌던 수녀님들이 함께 하며
다시 수녀원을 세우고
많은 지원자들과 함께
큰 수녀원으로 발전하여
사수동에 본원을 기초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사목과 본당사목
그리고 교육사업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300명이 넘는 수녀님들이
새로운 프리오랏의 필요성에 합의하여
서울지역에 이미 자리하고 있던
상지 피정의 집 터에
본원을 기초하며 한국에서의
제 2 프리오랏이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청각 장애인등을 위한
사회사목에 역점 하였으며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사도직을 모색하며
현재 130명 정도의 수녀들로
이루어진 수녀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80년 이전 부터 서울지역의 유일한 피정 센터, 교육관이었던 상지 피정의 집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각 연령층과 여러 직업군 별로 차별화된 가톨릭 교육과 피정을 주도해 왔다. (아래는 70년대 - 선생님들을 위한 피정)



수비아꼬 수도원에 그려진 벽화들
베네딕도와 쌍동이 스콜라스티카가 영적담화를 나누다 비가 오는 모습
마오로가 베네딕도 성인에게 즉각적인 순명으로 플라치도를 구하려 물위를 걷는 모습

몬테 카시노 수도원 성당에서 내려다 본 수도원 모습


지진과 전쟁 중 폭격으로 수차례 무너졌던 몬테 카시노 수도원


Pugu로 파견된 첫 순교자들 1910년 툿찡 모원의 단체사진


왼쪽 원산 수녀원의 건물과 위쪽 사진은 덕원 (상트 오틸리엔 수족) 수도원의 모습이다.



~ 1999 7 10
4
사수동 대구 수녀원
4 대 총장 Mathilde Hirsch 1933~1947
7 , 9대 총장 Gertrud Link 1967~1982
10 대 총장 Edeltrud Weist 1982-1994
마틸데 수녀님은 처음 한국 땅을 밝은 4분 중의 한분으로, 겔뚜르드 수녀님은 우리나라에서 초창기와 6.25를 겪으시면서, 에델뚜르드 수녀님은 한국에서 베네딕도 수녀원이 굳건히 자리잡고 서울 프리오랏을 설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시고, 후에 총장으로 봉사하신 분들이다.
osbtutzing.org > Library > Mother General 참조

한국으로 돌아오시어 대구
에서 돌아가신 수녀님들
오트마라 수녀님 ~1986
옵타다 수녀님 ~1990
벨트뷔나 수녀님 ~ 2014
디오메데스 수녀님~1998
에나타 수녀님 ~1995
까리따스 수녀님 ~2005
프리트헬마 수녀님 ~1999
아르사시아 수녀님 ~2002

앞이 "옥사독" 귀환 지 에른스트 신부, 오른쪽 앞이 벨트뷔나나 체사르 수녀, 오른 쪽 뒤가 스위스 출신 오트라마 원장 수녀, 왼쪽 앞이 "옥사독"에서 주방 담당으로 희생적인 활약을 한 옵타다 수녀, 왼쪽 뒤가 역시 귀환한 양치기 아르사시아 수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