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얼굴

December 8, 2015

교황은 ‘평신도들이 자비를 실천하고 다양한 사회환경에 자비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시대의 모든 이를 위로해 주도록 부름받고 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어 4월 11일에는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발표하였다.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빕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는 이 말로 잘 요약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는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자비가 풍성하신”(에페 2,4) 아버지께서는 모세에게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하느님”(탈출 34,6 참조)이라고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시고 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하신 본성을 끊임없이 보여 주십니다. 구원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때가 차자”(갈라 4,4)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1)

 

2. 우리는 언제나 자비의 신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신비는 기쁨과 고요와 평화의 샘입니다. 여기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거룩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궁극적인 최고의 행위입니다. 자비는 인생길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를 진실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근본 법칙입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3.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자비에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도록 부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합니다. 이 특별 희년에 신자들이 더욱 힘차고 효과적인 증언을 하여 교회에 은총의 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년은 201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시작됩니다. 이 대축일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어떻게 활동하셨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죄악에 얽매인 채로 버려두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사랑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인간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에페 1,4 참조). 무거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용서로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어떠한 죄보다도 더 크므로 그 누구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저는 성문(聖門)을 여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날, 성문은 자비의 문이 될 것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며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대림 제3주일에 로마 주교좌 대성당, 곧 성 요한 라테라노 교황 대성전의 성문이 열릴 것입니다. 이어서 다른 교황 대성전들의 성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주일에 저는, 모든 개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어머니 교회인 주교좌 대성당이나 공동 주교좌 대성당, 또는 특별히 중요한 성당에서 자비의 문을 열고 성년 내내 열어 두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순례지에서도 교구장 주교의 권위로 자비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에서 순례자들은 마음으로 은총을 체험하고 회개의 길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개별 교회는 직접 참여하여 이 성년을 특별한 은총의 때와 영적 쇄신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로마와 더불어 개별 교회에서도 온 교회의 가시적 친교의 표징으로 이 희년을 지내기 바랍니다.

 

4. 제가 12월 8일을 선택한 것은 이날이 교회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이 되는 이날 성문을 열 것입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성령 강림 때처럼 공의회 교부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동시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안온한 도성처럼 감싸 주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는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을 각성하였습니다.

요한 23세 성인이 공의회를 시작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던 뜻깊은 말씀을 되새깁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이 아닌 자비의 영약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 가톨릭 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신앙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사랑이 넘치는 모든 이의 어머니, 인자하고 인내하는 어머니, 갈라져 사는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자비로운 어머니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2) 바오로 6세 복자는 공의회를 마치면서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의 옛 이야기가 우리 공의회의 정신을 이끌어 준 모범이자 규범이었습니다. …… 공의회는 현대인들에게 열정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류는 완전히 거부되었습니다. 진리만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도 오류를 거부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오류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공의회는 분명히 정신을 혼란시키는 질병을 깨닫고 위로가 가득한 구원의 영약을 가져다주었으며 불길한 징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신뢰의 메시지를 현대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 다음과 같은 것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공의회의 풍요로운 가르침은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간, 온갖 나약함을 지닌 인간, 갖가지 요구를 지닌 인간에게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3)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가 받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 앞에 놓인 직무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례하는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힘을 굳게 믿으며 저는 성문을 열고 지나갈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발걸음을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도록 이끄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시고 이끌어 주시어 그들이 자비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4) 

 

5. 희년은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끝날 것입니다.

 

그날 성문을 닫을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이렇게 특별한 은총의 시간을 주신 성삼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교회의 삶과 모든 인간과 무한한 우주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맡겨 드리며 미래의 풍요로운 역사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아침 이슬처럼 내려 주시기를 빌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마다 자비가 넘쳐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온유하심을 가져다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에 이미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자비의 향유가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모든 이에게 전해지기를 빕니다.

 

6.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 5)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전례의 가장 오래된 본기도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6) 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가까이 계시며 섭리하시는 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현존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분노에 더디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말로 자주 하느님의 본성이 묘사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것은 그분의 인자하심이 징벌과 파멸보다 앞서는 구원 역사의 많은 순간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시편은 주님의 위업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 103[102],3-4). 시편의 다른 곳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주님 자비의 구체적인 표지를 보여 줍니다.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붙잡힌 이들을 풀어 주시고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며 꺾인 이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의인들을 사랑하시고 이방인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꺾어 버리신다”(시편 146[145],7-9). 시편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신다. ……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을 땅바닥까지 낮추신다”(시편 147[146-147],3.6).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

 

7.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는 하느님의 계시 역사를 노래하는 시편 136편의 모든 절마다 반복되는 후렴구입니다. 자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사건이 심오한 구원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자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켜 줍니다. 이 시편처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라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영원한 사랑의 신비 안으로 들여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눈길 아래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른바 대찬양이라고 하는 이 시편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전례 축일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하시기 전에 이 자비의 시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마태 26,30) 올리브 산으로 갔다고 말했을 때 이를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례를 당신과 당신의 파스카 희생에 대한 영원한 기념제로 제정하시면서, 자비의 빛이 상징적으로 이 최고의 계시 행위를 비추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자비의 지평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성될 위대한 사랑의 신비를 의식하시며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 시편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날마다 바치는 기도에서 이 찬미의 후렴구를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8.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자비로운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면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온전히 드러내라는 임무를 아버지께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이는 요한 복음사가가 성경 전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이제 예수님의 온 삶에서 눈에 보이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자신을 거저 내어 주는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과 그분께서 맺는 관계는 각기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에게 행하신 모든 기적은 자비를 보여 줍니다.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비가 넘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보시자 그들이 지도자 없이 길을 잃고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것을 알아채시고 무척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태 9,36 참조). 그분께서는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마태 14,14 참조), 빵 몇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7 참조).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자비였습니다. 그 자비로 당신께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절실한 바람을 채워 주셨습니다. 외아들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나인의 과부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울부짖는 어머니의 커다란 고통을 보시고 무척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어머니에게 돌려주셨습니다(루카 7,15 참조). 게라사인 지방에서 마귀 들렸던 사람을 고쳐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마태오를 부르신 것도 자비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 앞을 지나시다가 마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눈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며 세리인 그를 뽑아 열 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삼으셨습니다. 베다 성인은 이 복음 구절을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자비로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 7) 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저는 이를 제 문장에 넣었습니다.

 

9. 자비에 관한 비유들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본성을,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본성으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들 중에 세 가지 이야기, 곧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과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루카 15,1-32 참조). 이 비유들에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기쁨에 넘치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해 주실 때에 더욱 기뻐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과 우리 신앙의 핵심을 발견합니다. 자비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힘으로 드러나며, 마음속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고 용서를 통하여 위로를 가져다줍니다.

또 다른 비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그분은 또한 매정한 종에 대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많은 빚을 진 종을 부르자, 그가 엎드려 절하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은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얼마 되지도 않는 빚을 진 동료가 그에게 엎드려 자비를 청하자 들어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주인이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그 종을 다시 불러들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이렇게 마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 일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자비로운 사랑의 명확한 표현이고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계명입니다. 거듭 용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워 보입니까! 그럼에도 용서는 우리의 나약한 손에 쥐어진 도구이며 이로써 우리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것입니다. 반드시 증오와 분노를 버리고, 폭력과 복수를 포기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의 권고를 받아들입시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 무엇보다도 먼저 자비를 삶의 이상으로 제시하시고 우리 신앙에 대한 신뢰성의 기준으로 삼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이 참행복을 우리는 이 성년에 특별히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경에 나타난 자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행위를 가리키는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다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사실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단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구체적인 삶입니다. 일상의 행동에서 사랑은 생각과 태도와 습관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책임을 느끼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우리의 안녕을 바라시며 우리가 행복해 하고 기쁨에 넘쳐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비로운 사랑도 바로 이러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듯이, 자녀들도 그렇게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10. 자비는 교회 생활의 토대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목 활동은 온유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온유함을 신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이든 세상에 대한 증언이든 그 어떠한 것도 자비가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자비와 연민이 가득 찬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자비를 베풀려는 끝없는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8)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자비의 길을 가리키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 언제나 정의만을 요구하려는 것은 정의가 필수불가결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더 높은 더욱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한편, 슬프게도 우리의 문화에서 용서에 대한 경험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용서라는 말조차도 사라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용서에 대한 보증이 없다면 우리는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불모의 삶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용서를 기쁘게 선포하여야 할 때가 다시 왔습니다. 이제 근본으로 돌아가 우리 형제자매들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11.  우리는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이 그의 두 번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에서 말씀하신 훌륭한 가르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발표된 그 회칙의 주제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저는 특별히 두 가지 말씀을 새기고자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시대의 문화가 자비에 대하여 잊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하며, 자비라는 개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역사상 전대미문의 과학과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창세 1,28 참조). 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산 신앙의 정신으로 움직이는 많은 인간들과 집단들이 교회와 현대 세계의 상황을 보고 거의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9)  

이어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지금 이 세상에 자비를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사유란 인간을 위하는 사랑에서 오는 명령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것, 많은 현대인들이 예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거대한 위험으로 위협당하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아끼는 사랑에서 오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신비가 자비를 선포하라는 의무를, 그것이 같은 신비에서 계시된 자비로운 사랑임을 선포하라는 의무를 저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자비에 호소하라는 의무를 지우며, 이천년대가 끝나 가는 교회와 세계의 역사에서 이 험난하고도 위급한 시점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라는 의무를 지우고 있습니다.” 10)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이 가르침은 이 성년에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입니다.” 11)  

 

12. 교회는 복음의 뛰는 심장인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자비가 모든 이의 마음과 정신에 가 닿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받습니다. 교회가 새 복음화의 사명을 받은 오늘날 자비를 새로운 열정과 사목 활동으로 거듭 알려야 합니다. 교회가 스스로 자비를 실천하고 증언하는 것이 교회와 그 메시지의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으뜸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교회는 용서와 헌신으로 이끄는 이러한 사랑의 봉사자요 전달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 단체와 운동, 곧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13. 이 희년에 우리는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줍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힘들지만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삶을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모든 이를 향한 것입니다(루카 6,27 참조). 자비를 실천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곧 우리를 향하신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침묵의 가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관상하고 우리의 생활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4. 성년에 하는 순례는 특별한 표징입니다.

 

순례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지나온 길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순례이고, 인간은 나그네, 곧 간절히 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을 가는 순례자입니다. 로마나 세상의 다른 곳에 있는 성문을 향하여 모든 이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순례를 하여야 합니다. 순례는 자비 또한 그 목적지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노력과 희생을 다하여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순례는 회개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문을 지나가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감싸 주시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힘써 노력할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우리에게 순례의 단계를 보여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제 형제자매를 심판하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할 때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내면 깊숙한 곳을 보십니다. 질투심과 시기심에서 나오는 말은 얼마나 해롭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험담하는 것은 그들을 곤란한 입장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명예를 떨어뜨려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우리의 편파적인 판단과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어떤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자비를 표현하기에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곧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의 도구가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음을 깨달아 우리도 남에게 관대하게 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성년의 모토는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라입니다. 자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증거를 발견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당신을 온전히 거저 내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러 오십니다. 교회가 매일 기도를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0[69],2)로 시작하는 것은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가 간청하는 도움은 이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의 첫 단계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놓인 나약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십니다. 그분의 도우심은 당신의 현존과 가까이 계심을 우리가 깨닫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어 우리도 나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15. 우리 시대의 세계가 종종 비참한 방식으로 만들어 낸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성년에 우리는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외침이 부유한 이들의 무관심에 파묻혀 들리지 않게 되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은 너무도 많은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이 희년에 교회는 이러한 상처들을 돌보아 주라는 부르심, 그들의 상처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 주고 자비로 감싸 주며 연대와 세심한 배려로 치유하여 주라는 부르심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모욕적인 무관심이나 우리의 정서를 마비시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습관과 파괴적인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주어 그들이 우리의 현존과 우정과 형제애의 온정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고, 우리의 위선과 이기심을 감추려고 기꺼이 빠지는 무관심의 장벽을 모두 함께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희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가난이라는 비참함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다시 일깨워 주고, 또한 복음의 핵심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이러한 활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곧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주며,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며,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의 영적 활동도 잊지 맙시다. 곧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들을 따뜻이 맞아 주었는지,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지, 병든 이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감옥에 있는 이들을 찾아가 주었는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25,31-45 참조). 또한 절망으로 몰아넣고 흔히 외로움의 근원이 되는 의혹에서 벗어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수단을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무지를 극복하도록 우리가 도와주었는지, 외롭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는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하고 폭력을 낳는 온갖 분노와 증오를 떨쳐 버렸는지, 하느님께서 한없이 우리를 참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인내하였는지, 우리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 드렸는지 우리는 대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잊지 맙시다. “우리의 삶이 저물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2)  

 

16. 우리가 이 희년을 신앙으로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다른 중요한 측면을 루카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성경을 봉독 해 주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봉독하신 이사야 예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자비의 해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혜의 해로 우리가 이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 성년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에서 울려 퍼진 예수님의 수많은 사명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