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베네딕도 성인에 대한 내용은 허 가브리엘 신부님의   베네딕도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신 내용을 자료로 간추려 싣는다.

 

osb.org 에 링크로 가기 

 

왜관 수도원 자료로 가기

 

대화집 2권 - 베네딕도의 생애 영어본

​                  영상방문   클릭

누르시아 - 수비아꼬  - 몬테카시노 

사부 성 베네딕도의

거룩한 규칙서 

베네딕도 규칙서는 균형과 중용, 합리성을 두루 갖고 있었으며, 중세에 세워진 대부분의 교회 공동체는 베네딕도의  이 규칙서 정신의 적용을 받아 세워졌다.

 

서방 기독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규칙서 가운데 하나이며, 서방 수도생활의 초석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 영성과 서유럽 문화 진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대화집 2권 

 

《대화록》은 6세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동하였던 성인들(대부분 수사)의 행적과 기적 등에 대한 글을 총 4권의 책으로 나누어 집필한 것이며, 이 가운데 제2권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다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

 (480-547?)

사부 성 베네딕도

성 베네딕도

 

성 베네딕도의 영적여정

 

 

 

 

 

 

 

I. 서 론 

 

II. 대화집 제2권

 

1. 그레고리오 대 교황과 그의 작품들

 

2.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의도

 

III. 베네딕도 성인의 영적 여정 

 

A. 세상으로부터의 떠남

 

1. 노르치아(Norcia) 

 

2. 로 마(Roma) 

 

3. 엔피데(Enfide)

 

4. 거룩한 동굴(Sacro Speco)

 

B. 세상에로의 복귀

 

1. 수비아꼬 동굴에서 3년을 보낸 후

 

    1) 한 사제에게 드러남

 

    2) 목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남

 

2. 비꼬바로(Vicovaro)

 

3. 수비아꼬(Subiaco)

 

4.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1) 사탄과의 전쟁 

 

    2) 예언의 카리스마

 

      ① 또띨라 왕의 방문

 

      ② 몬테까시노의 멸망을 예언함

 

      ③ 밀가루 200 포대

 

    3) 기적의 힘

 

      ① 악령들린 수도자의 치유

 

      ② 나병의 치유

 

      ③ 죽은 사람의 소생

 

    4) 스콜라스티카의 기적

 

C. 죽 음

 

IV. 성 베네딕도의 영적 진보

 

1. 떠남의 단계

 

2. 되 돌아옴의 단계

 

V. 결 론 


 

간추린 내용

480년경 이태리 움브리아 지역 누르치아에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여 학업을 위해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에서 타락에 빠진 도시를 목격하고 학업을 그만두고 하느님을 찾아 로마를 떠난다.

유모가 빌려온 체를 부서뜨리고 우는 것을 보고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것을 복구시키는 기적을 일으킨다.

엔피데를 떠나 하느님께 더 깊이 나아가고자 은수 동굴 수비아꼬에 거처한다.

절벽 아래 있는 이 동굴에서 홀로 거하며 로마노로 부터 빵과 물을 소쿠리로 내려 받고 3년을 지낸다.  그가 아마도 베네딕도의 영적 스승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에게서 수도복을 받았다.

그가 영성이 뛰어난 은수자임을 알아챈 주변의 목자들과 사제들이 가르침을 얻기 위해 베네딕도를 찾아온다.

영적으로 진보하면서 함께 욕정의 유혹을 받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시덤불에 몸을 굴리기도 하였다.

인근 수도원에서 끈질긴 요청으로 베네딕도를 아빠스로 모시지만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싫어지자 마시는 잔에 독을 타서 죽이려 하였고 이를 베네딕도 성인이 음식에 강복하면서 잔이 즉시 깨짐으로 그들의 음모에 훈시를 주고 다시 수비아꼬로 되돌아 간다.

수비아꼬로 돌아온 후에 그의 명성이 더욱 퍼져 그를 따르려는 많은 제자들이 몰려 왔고 그의 제자들을 수도원 밖으로 꼬여 내려는 마귀들을 베네딕도 성인이 비전으로 보고 막대기로 쳐서 쫒아낸다. 

절벽 아래 계곡 물에 어느 날 제자 플라치도가 빠져 들었고 베네딕도는 비전으로 즉시 이를 알게 되어 다른 제자 마오로에게 가서 그를 구해 주라고 명하고 지체없이 순명한 마오로는 물위를 걸어 플라치도를 물에서 끄집어 내는데 그는 베네딕도의 비전을 보며 플라치도를 구한 것이 베네딕도임을 알았다.

베네딕도가 절벽 위에 세운 수도원은 너무 가파르고 물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제자들의 불평을 듣고 그는 돌로 표시한 자리에서 물이 솟도록 기도하여 우물을 얻도록 해 주었다.

그의 명성으로 사람들이 베네딕도를 추앙하자 인근 본당 사제가 그를 시기하여 베네딕도에게 독이 든 빵을 보내고 이를 알아챈 베네딕도가 그 빵을 멀리 가져다 버리도록 까마귀에게 명령하자 까마귀가 독이 든 빵을 멀리 가져다 버린 후 다시 돌아왔다.

수비아꼬를 떠나 베네딕도는 이태리의 전략적 요충지인  몬테 카시노 (카시노 산)을 향해 떠난다.

사탄이 끊임없이 베네딕도가 몬테까시노에 지은 수도원에서 떠나게 하려고 해꼬지를 하였으나 베네딕도는 더욱 강한 영적 무기로 주변을 정화 시켜 나갔다.

베네딕도는 몬테 카시노에서 서방 수도원의 기초가 되는 12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당시에 전쟁 중에 악명높은 토틸라 왕이 베네딕도의 명성을 듣고 몬테 카시노에서 그를 만나러 가면서 신하와 복장을 바꾸어 그를 시험하였으나 베네딕도는 이를 꾸짖고 토틸라가 로마를 정복하며 언제 죽게 될지 예언을 한다.

베네딕도는 병자와 가난한 자를 악령에서 해방 시키고, 나병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는 기적도 행한다.

쌍둥이 누이 스콜라스티카는 또한 베네딕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영적인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수도원의 만남의 장소에서 밤이 깊어지자 아쉬워 하는 스콜라스티카를 남겨 두고 수도원으로 돌아가려하자 스콜라스티카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려  갑작스런 천둥과 큰 비로 베네딕도가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밤새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 며칠 후 베네딕도는 스콜라스티카가 비둘기 형상으로 육신을 떠나 하느님께 올라가는 비전을 보게 된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왔음을 알고 베네딕도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리게 하여 두 팔을 하늘로 뻗고 임종을 맞이한다.

성 베네딕도

 

성 베네딕도의 영적여정

 

 글쓴이 : 허성준 로무알도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I. 서 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 그것은 바로 영적인 여정이다. 많은 성인들과 성녀들은 비록 그들이 인간적인 한계와 부족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자신들의 온 삶을 불태워 열렬하게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충실히 살아갔던 분들이다. 특히 전 유럽의 수호 성인, 베네딕도는 오롯이 하느님만을 사랑하고자 그의 온 삶을 투신하였다. 성인의 전 삶은 우리의 영적 여정에 하나의 안내판으로서 많은 것을 제시해 준다. 즉 오늘날 많은 활동으로 분주한 현대인에게, 우리의 삶이 진정 어디에 뿌리 내려야 하고, 또한 어떻게 세상에 투신해야 하는지를 그분의 삶은 극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네딕도(480-547?) 성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오직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 직접 쓴 대화집 제2권만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베네딕도 성인의 삶에 관한 유일하고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이 소고에서는 대화집 제2권을 바탕으로 해서 베네딕도 성인의 영적인 긴 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대화집 제2권

 

1. 그레고리오 대 교황과 그의 작품들

 

수도승으로서 처음으로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대 교황(540-604)은 540년경에 로마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원로원이였던 골디아노(Goldiano)였고, 그의 어머니는 실비아(Silvia)였다. 572년,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 집정관이 되지만 부친의 죽음과 더불어 곧 사회적인 지위를 버리고 수도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레고리오는 유산 중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나머지는 일곱 개의 수도원들을 세우는데 사용한다. 특별히 그는 부친의 집을 개조하여 수도원으로 만든다. 아마도 그는 베네딕도 성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롬바르도인들의 침입으로 베네딕도의 제자들이 몬테카시노에서 로마로 피신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도 I세(574-579) 교황에 의해 사제로 서품 되었고, 586년에 자기 수도원의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590년에 그는 교황 ꥉ라지오 2세의 뒤를 이어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604년까지 정열을 다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한다. 그레고리오는 교황으로서 교회에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깊은 내면에 언제나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이점은 베네딕도 성인에 관한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서간집 14권과, 성서에 대한 여러 강론들과, 그리고 대화집 제1-4권을 포함하여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특히 베네딕도 성인과 이태리의 여러 성인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화집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여러 성인들의 삶에 관한 빨라디오(Palladius)의 작품, "라우라의 역사"(Historia Lausiaca)와 불란서 지역의 성 마르티노의 생애에 관한 술피치오(Sulpicius Severus)의 작품, "마르띠노의 생애"(Vita Martini)와도 유사점이 많다. 대화집 제2권은 그레고리 교황과 베드로 부제와의 친밀한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베네딕도 성인의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베네딕도 성인의 네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참조하면서 베네딕도의 생애를 구성하였다. 이 작품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도의 생애에 관한 중요한 윤곽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드 보궤(Adalbert de Vogüé) 신부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즉 우리가 대화집을 읽을 때, 그것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의도

 

그레고리오 교황은 왜 당시의 많은 성인들 가운데서 유독 베네딕도 성인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그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미 성 안또니오의 생애가 그리고 불란서에서는 성 마르티노의 생애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태리에서는 당시 그들과 같은 유명한 성인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다른 나라의 유명한 성인들과 같이 이태리에도 베네딕도 성인과 같은 탁월한 분이 있었음을 소개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둘째는 그레고리오 교황은 자신의 수도 생활의 이상으로서 베네딕도의 모습을 늘 동경하였던 것 같다. 그레고리오 교황 자신이 "욥의 윤리"(Moralia in Job)에서 고백하였듯이, 베네딕도 성인은 젊어서 일찍 개종한 반면, 자신은 베네딕도 성인과 같이 그렇게 빨리 개종하지 못했다. 더우기 베네딕도 성인은 실제로 은수생활을 살고 그리고 사랑했음에 반해, 그레고리오 교황은 자신이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은수생활에 대해서 늘 동경만 하였었다. 아마도 그레고리오 교황은 사도직의 모델로서 그리고 자신의 완전한 스승으로서 베네딕도 성인을 발견하였던 것 같다. 셋째는 그레고리오 교황은 우리들에게 베네딕도의 삶을 통해서 가톨릭 신앙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즉 그레고리오 교황은 다양한 기적들을 행했던 베네딕도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영적인 삶에로 인도하고자 의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레고리오 교황이 직접 쓴 베네딕도 성인의 전기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는 세상에 더욱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III. 베네딕도 성인의 영적 여정 

 

A. 세상으로부터의 떠남

 

1. 노르치아(Norcia)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성인이 480년경 이태리 움브리아 지역의 작은 도시 노르치아의 자유민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대화집 제2권, 서언). 이태리 밀라노 교구의 총 대주교였던 일데퐁스 슈스터(Ildefonso Schuster)에 의하면, 노르치아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영광스러운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더우기 수도 생활에 있어 그 곳은 베네딕도 성인 이전에 이미 여러 거룩한 수도승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성 에우띠치오(Eutychius), 플로렌스(Florence), 그리고 스페스 아빠스(Abbot Spes) 등등이다. 특별히 스페스 아빠스의 기도소에서의 거룩한 죽음은 후에 베네딕도 성인의 죽음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즉 마지막 날에 스페스 아빠스는 그의 수도승들을 성당에 모이게 한 다음 마지막 유언을 하고 성체를 영한 후, 자신의 거룩한 영혼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였다(대화집 제4권, 9-10). 아마도 베네딕도는 노르치아의 이러한 거룩한 사람들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한편 베네딕도 성인의 탄생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속 논쟁 중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데퐁스 슈스터는 성인이 아마도 470년경에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드 보궤는 성인의 탄생을 480-49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성인의 탄생을 480년경으로 추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1980년도에 전 세계 베네딕도 회원들은 베네딕도 탄생 1500주년을 거행하였다. 

 

또한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정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다. 단지 대화집에 의하면, 성인의 가정이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의 부모는 그 지방의 유지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 베네딕도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유모와 함께 성인을 로마에 보냈기 때문이다(대화집 제2권, 1). 이점에서 레오나르드(Leonard)는 성인의 부모들이 부유하였으며 또한 매우 신심 깊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딸 스콜라스티까를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봉헌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까가 매우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로 마(Roma) 

 

당시의 다른 부유한 집안에서 그러했듯이, 베네딕도의 부모들은 성인을 더 공부시키기 위해서 로마로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어린 베네딕도는 띠뚤루스 체칠리에(Titulus Caeciliae)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뜨라스떼베레(Trastevere)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한편 대화집에 의하면 성인은 그 당시 널리 유행하고 있었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이점에서 우리는 당시에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들이 함께 문학을 공부했고 또한 그리스도교 문화와 고전문화 사이에 어떤 뚜렷한 구별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로마에서 그의 학업을 계속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점은 베네딕도가 왜 학업을 포기하고 로마를 떠났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그레고리오 교황이 대화집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듯이 그 당시의 타락한 학문적인 상황이다. 베네딕도는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서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대화집 제2권, 서언). 

 

둘째는 그 당시 교회 내에는 교황좌의 분리가 있었다. 즉 교황 펠릭스(483-492)는 알렉산드리아의 총 대주교인 빼뜨루스 몽구스(Petrus Mongus)를 484년에 파문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황좌의 분열의 시작되었다. 그 후 아타나시오 2세(496-498)가 2년 동안 로마 교황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이미 두 부류의 성직자 그룹이 있었다. 498년 11월 아타나시오 2세의 사망과 더불어 그들은 자신들의 교황을 따로 따로 선출하였다<사르디니안 출신이었던 심마꼬(Symmachus)와 라우렌시오(Laurentius)가 각각 교황으로 선출됨>. 그때 베네딕도는 당연히 로마 교회의 이러한 슬픈 분열상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셋째는 베네딕도 성인의 신적인 소명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성인이 회개한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서에 보면 아브라함이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즉시 자신의 고향과 친척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느님이 그에게 보여준 땅으로 갔다(창세기 12, 1-4). 위대한 사막의 은수자들의 아버지 성 안또니오 역시 주일 미사 중에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즉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베네딕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 당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속적인 공부, 부모, 집 그리고 그의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로마를 떠났다(대화집 제2권, 1). 이점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베네딕도가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갈망"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대화집 제2권, 서언). 아마도 그 당시 "하느님만"이 성인의 유일한 몫이었고 소명이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베네딕도는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속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떠났다. 



 

3. 엔피데(Enfide)

 

베네딕도는 그의 유모와 함께 로마를 떠나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엔피데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성 베드로 성당에 머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심 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그들이 베네딕도와 유모를 거기에 머무르도록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유스띠노 아빠스(Abbot Justin)는 베네딕도 자신이 거룩한 직무를 준비하기 위해서 엔피데에 머물렀다고 주장한다.더우기 몇몇 사람들은 베네딕도가 이곳에서 서품 되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냐하면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까지는 사실 교회 안에 정규 신학교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가설일 뿐 믿을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아무튼 베네딕도는 그의 첫 번째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였다. 즉 어느 날 그의 유모가 이웃에서 체 하나를 빌려왔는데 그녀의 부주의로 인해 그 체가 땅에 떨어져 두 조각으로 부서졌다. 이에 유모가 우는 것을 보고 베네딕도는 그것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은 다음 하느님께 진지하게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두 조각났던 체는 신기하리만큼 다시 원래의 상태대로 복구되었다(대화집 제2권, 1). 이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과도 매우 비슷하다. 즉 예수님은 어머니의 요청에 의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였다(요한 2, 1-12). 예수님의 경우와 비슷하게 베네딕도 성인은 그에게 어머니와도 같았던 유모를 위해서 엔피데에서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경우, 어머니에 의해 기적이 요청되었지만 베네딕도의 경우는 유모에 의해 기적이 요청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성서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 없이 첫 번째 기적을 행한 반면, 베네딕도의 경우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성인의 이 기적 사건은 순식간에 엔피데 주위에 퍼지게 되었고, 그곳 주민들은 그 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상징적으로 성당 정문 위에 걸어 놓았다. 그것은 롬바르도족이 침입할 때까지 그곳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대화집 제2권, 1). 우리는 여기서 그 당시 어린 베네딕도 성인의 명성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베네딕도는 이 기적 사건 때문에 엔피데를 떠나게 되는데 사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베네딕도 성인이 영성생활에서 위험한 '허영심'(Vainglory)을 피하기 위해서 그곳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베네딕도는 칭찬받기 보다는 세상의 고통을 당하기를 더 원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대화집 제2권, 1). 베네딕도는 분명히 단순한 그 마을 사람들의 눈에 놀라운 일을 행하는 자로서의 새로운 자기 지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는 우리의 수덕 생활에서 여덟 개의 악덕들을 언급하면서 '허영심'을 가장 교묘한 것으로써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덕을 실천하는 영혼 안에 그것이 급속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요한 가시아노(John Cassian) 역시 초심자는 쉽게 '허영심'에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제도서 XI). 이점에서 베네딕도는 엔피데를 떠남으로서 초심자로서 그러한 유혹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둘째는 엔피데는 베네딕도에게 그의 영적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성인의 긴 영적 여정중의 한 단계에 불과하였다. 셋째는 아마도 베네딕도는 그 당시 "하느님만"을 위해서 더 깊은 삶을 살기를 희망하였던 것 같다.



 

4. 거룩한 동굴 (Sacro Speco)

 

성 베네딕도는 첫 번째 기적 후, 엔피데를 떠나 그의 영적 여정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아니에네(Aniene) 계곡으로 간다. 이 계곡 밑에는 버려진 네로 황제의 별장과 호수가 있었다. 아무튼 대화집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길 위에서 로마노(Romanus)라는 수도승을 만난다. 테오도로(Theodore)가 주장하듯이, 아마도 로마노는 처음에 베네딕도에게 자신의 공동체나 혹은 다른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권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어떤 공동체에 입회하거나 혹은 은수자들의 그룹에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더 철저히 홀로 있기를 원했다. 결국 로마노는 베네딕도가 머무를 수 있는 동굴로 그를 인도한다. 이 동굴은 가파르게 서 있는 절벽 아래쪽의 아니에네 계곡 오른쪽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동굴은 오늘날까지 "Sacro Speco" 즉 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동굴'로 알려져 있다. 로마노는 베네딕도에게 염소가죽 혹은 양가죽으로 만든 수도복을 수여하였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베네딕도가 이제 수도승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성 빠꼬미오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즉 빠꼬미오 역시 스승인 팔레몬(Palemon)으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그러나 빠꼬미오는 수련을 받은 후에 스승으로부터 수도복을 받은 반면, 베네딕도는 수련기 없이, 그리고 스승이 아닌 로마노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일데퐁스 슈스터는 베네딕도가 로마노로부터 수도복과 하느님께 대한 명확한 봉헌의 상징으로서 삭발례도 함께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대화집은 오직 수도복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삭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대화집 제2권, 1). 

 

그 이후 로마노가 계속 베네딕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베네딕도는 3년 동안 철저히 감추어진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점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은 로마노가 어떻게 성인을 도와주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약간의 정보를 주고 있다. 로마노는 자기 수도원에서 자신의 몫으로 나온 빵을 남겨서 정기적으로 베네딕도에게 가져다 주곤 하였다. 로마노는 언제나 줄 끝에 빵을 달아 방울과 함께 절벽 아래로 내리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나이 많은 한 수도승(대화집에서는 그를 "옛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다)이 보고는 즉시 돌을 던져 줄 끝에 달린 방울을 깨뜨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노는 베네딕도를 위한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베네딕도는 그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자로서 살았다. 대화집에 의하면 그는 그 기간동안 미사나 다른 전례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번도 동굴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집트 수도승들은 한 주일에 최소한 한번이나 두 번 즉 토요일이나 혹은 일요일에 근처의 성당에 모여 함께 기도하였다. 베네딕도는 이집트 수도승들과는 달리 만 3년 동안 결코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B. 세상에로의 복귀

 

1. 수비아꼬 동굴에서 3년을 보낸 후

 

1) 한 사제에게 드러남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은 베네딕도를 힘든 수고로부터 쉬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때부터 베네딕도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먼저 부활 주일에 한 거룩한 사제가 베네딕도를 찾아왔다. 주님은 환시를 통해 그 사제에게 나타나서 "나는 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 종이 저곳에서 허기로 고생하고 있다"(대화집 제2권, 1) 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제는 즉시 약간의 음식을 들고 베네딕도를 향해서 길을 떠났다. 그 사제가 베네딕도를 발견했을 때 성인은 사막의 교부들과 같이 친절히 그를 맞이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함께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는데, 이러한 기도는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방문을 더욱 거룩하게 하였던 것 같다. 

 

후에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를 쓰면서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영해야 함을 강조하였다(RB 53, 1). 베네딕도는 명확하게 규칙서 53장에서 손님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2) 목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남

 

한편 같은 날 몇몇 목자들도 가죽옷을 입고 동굴 속에 숨어 있던 베네딕도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성인을 짐승으로 착각하였지만, 곧 하느님의 종인 성인을 알아보게 되었다. 더우기 그들은 베네딕도와의 만남으로써 자신들의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고 한다(대화집 제2권, 1). 이로써 성인의 이름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위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탄생 때 목자들이 그분을 발견하였듯이 당시 목자들은 3년 동안의 은거 생활을 한 베네딕도 성인을 발견하였다. 둘째는 성 안또니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금욕적인 생활 후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을 개방하였다. 여기서 안또니오 성인은 20년간의 금욕적인 생활 후에 자신을 개방한 반면, 베네딕도는 3년 후라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성 안또니오의 경우는 자기를 직접 찾아왔던 첫 번째 사람들에게 발견되어진 반면, 베네딕도는 하느님이 보낸 한 사제에게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 안또니오의 경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베네딕도 성인을 방문하였다. 그 당시 안또니오와 베네딕도는 그들을 위해 육적인 양식을 가지고 왔던 방문자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비록 베네딕도의 명성이 널리 퍼졌을지라도, 성인은 여전히 여러 유혹들에 직면해 있었다. 어느 날 욕정의 불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 베네딕도는 벌거벗은 몸으로 그의 온몸이 상처와 피로 얼룩질 때까지 가시덤불에 딩굴었다. 그 이후에 그는 다시는 이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는 이러한 덕에 있어 스승이 된 것이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은 더욱더 그에게 와서 지도를 받기를 원했다(대화집 제2권, 2). 이점에서 베네딕도는 에바그리우스와 요한 가시아노가 언급한 여덟개의 악덕중에서 '음욕'(lust)의 악덕을 극복한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경우와 같이 안또니오 성인 역시 사탄에 의해 이러한 유혹을 당하였다. 안또니오는 이러한 유혹에 직면했을 때 즉시 믿음, 기도, 단식, 그리스도께 대한 묵상, 그리고 지옥불의 무서움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그러한 유혹을 물리친 반면, 베네딕도는 실제로 자신의 몸을 가시덤불에 던짐으로써 그러한 유혹을 극복하였다. 또 다른 점은 베네딕도의 경우는 이전에 언젠가 한번 보았던 한 여인의 상에 의해 유혹을 받은 반면, 안또니오의 경우는 일반적인 여자에 대한 이미지에 의해 유혹을 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성 베네딕도에게 거룩한 동굴에서의 시간은 그의 긴 영적인 여정에서 볼 때 마치 어머니의 모태와도 같은 그러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영적인 삶은 더욱더 깊게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2. 비꼬바로(Vicovaro)

 

이제 베네딕도의 명성은 더욱더 널리 퍼져 나아가게 되었다. 그 무렵 인근의 한 수도원의 아빠스가 죽게 되자, 그곳의 수도승들이 베네딕도에게 와서 자신들의 아빠스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처음에 베네딕도는 여러 번 거절하였지만 그들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베네딕도는 거처를 그 수도원으로 옮기자마자 곧 수도원의 쇄신을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그곳에는 수도 생활의 정신이 많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인의 이러한 쇄신의 노력으로 인해 그곳 수도승들은 베네딕도를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성인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마실 포도주에 독을 넣고 관례에 따라 강복을 받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람인 베네딕도에게 그것을 가져갔다. 그러나 비록 먼 거리였으나 베네딕도가 그의 손을 뻗어 십자가의 성호를 긋자마자 그 잔은 즉시 깨져 버렸다. 이때부터 깨어진 잔과 십자가는 베네딕도 성인의 중요한 상징들이 되었다. 

 

아무튼 성인은 곧 그 잔 안에 독이 들어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그 수도승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들이여,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짓을 하려 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생활 방식과 나의 생활 방식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서 여러분 방식에 맞는 장상을 찾으십시오"(대화집 제2권, 3). 그 당시 베네딕도는 결코 8가지 악덕중의 하나인 '분노'(anger)에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평온하였으며 또한 그의 영혼이 평화 중에 있었음을 그레고리오 교황은 묘사하고 있다. 결국 베네딕도는 그들을 떠나 그가 사랑하던 이전의 고독한 장소로 다시 되돌아갔다(대화집 제2권, 3).

 

이 이야기는 베네딕도의 첫 번째 공적인 임무가 실패하였음을 드러내 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곳 수도원의 사악한 수도승들 때문이다. 레오나르드에 의하면, 그들은 동방 수도 생활의 모델에 기초된 느슨한 공동체 안에 살면서 각자는 개인의 분리된 독방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제멋대로 살았던 수도승들의 부류에 속했던 것 같다. 이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베네딕도를 자기들의 장상으로 모셔 가기를 원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나중에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그들과 같은 수도승들을 일컬어 "사라바이따"(Sarabaita) 즉 극히 나쁜 자들이라고 불렀다(RB 1, 6-9). 

 

또 다른 이유는 베네딕도 자신에게 있었다. 베네딕도는 처음에 은수생활을 하였고 후에 공동생활로 나아갔다. 이 두 공동체 생활양식 안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그 공동체에 가기 이전, 공동체 생활에 대한 아무런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베네딕도가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시작부터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다. 

 

셋째 이유로는 공동체를 통솔함에 있어 성인의 지도력을 문제삼을 수 있다. 시작부터 베네딕도는 엄격하게 그 수도원의 쇄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그 수도승들의 생활은 베네딕도의 이상적인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성인은 그 때에 이점을 깊이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후에 아빠스는 '현명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B 27, 2-5).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비록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후에 이것은 그에게 하나의 좋은 체험이었던 것 같다. 



 

3. 수비아꼬(Subiaco)

 

베네딕도는 수비아꼬로 되돌아온 후에 계속해서 덕행에 나아갔고 그리고 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행하였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더욱더 널리 퍼져 나아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는 열 두개의 수도원들을 세우고 각 수도원에 열 두명의 수도승들을 돌볼 장상들을 임명하였다(대화집 제2권, 3). 한편 로마의 신심 깊은 상류층 사람들도 성인을 찾아와 자기 자녀들을 그에게 의탁하였다. 예를 들면, 에우티치오(Euthicius)는 마오로(Maurus)를 그리고 귀족이었던 떼르뚤로(Tertullus) 는 쁠라치도(Placid)를 성인에게 맡겼다(대화집 제2권, 3). 

 

대화집에 의하면 베네딕도는 수비아꼬에서 네 가지 기적들을 행하였다.

 

첫 번째 이야기는 기도 중에 안절부절못하는 수도승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루는 베네딕도가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작고 검은 사탄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목격하였다. 아마도 성인은 그때 이미 초자연적인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마오로와 그 공동체의 장상인 뽐뻬이아노(Pompeianus)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느 놈이 저 수도승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 베네딕도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였다. 이틀 후에 마오로는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그 공동체의 장상은 그때까지도 볼 수 없었다. 베네딕도는 그 다음날 성당 밖에서 그 수도승을 발견하고는 그의 어두운 마음을 열기 위해서 막대기로 그를 내리쳤다. 그 날 이후 그 수도자는 그와 같은 사탄의 유혹에 다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대화집 제2권, 4). 

 

두 번째 이야기는 산 위에서 기적적인 샘물이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베네딕도가 세운 열 두개의 수도원들 중에서 세 개의 수도원들은 돌산 위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들의 수도승들은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베네딕도에게 불평하며 수도원을 옮기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그들을 위로하면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성인은 쁠라치도를 데리고 그 산 위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나서 거기에 3개의 돌로 그 자리를 표시해 놓은 후 자신의 수도원으로 되돌아 왔다. 다음날 그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다시 성인을 찾아와서 불평하자 성인은 그들에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3개의 돌을 발견하게 되거든 그곳을 파내라고 일러주었다. 그들이 성인의 지시대로 산 위에 올라가니 거기에는 3개의 돌이 있었고 이미 그곳에는 물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구덩이를 조금 파내자, 곧 그곳에 샘물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대화집 제2권, 5). 이 이야기는 성 안또니오와 모세의 일화들과도 매우 비슷하다. 모세 역시 사막에서 물의 기적을 행하였고(민수기 20, 1-13), 안또니오 성인 역시 사막에서 물의 기적을 행하였다. 이 일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도 후에 물의 기적이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물 속에 빠졌던 쇠붙이를 베네딕도 성인이 낫자루에 다시 붙게 한 사건이다(대화집 제2권, 6). 

 

네 번째 이야기는 베네딕도가 사랑하던 제자들인 마오로와 쁠라치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쁠라치도가 부주의로 인해 넘어져 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베네딕도는 즉시 자신의 방에서 이 사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인은 급하게 마오로를 불러 그로 하여금 물에 빠진 쁠라치도를 구해 주도록 명하였다. 마오로는 성인의 강복을 받자마자 쁠라치도가 허우적거리는 호수까지 달려가서는 그의 머리를 잡고 즉시 뭍으로 나왔다. 마오로가 뭍으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이 조금 전 물위를 달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모두 수도원으로 되돌아 왔을 때 베네딕도가 마오로의 순종을 크게 칭찬하자 오히려 마오로는 스승에게 그 공을 돌렸다. 그들이 이렇게 서로 상호적인 겸손의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쁠라치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제가 물에서 끌려 나올 때, 저는 머리 위에서 사부님의 모피 자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에서 저를 끌어 내온 사람은 마오로였습니다"(대화집 제2권, 7).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베네딕도와 제자 사이에서 서로의 겸손과 그리고 제자의 즉각적인 순종의 교훈을 얻게 된다. 특별히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겸손의 첫째 단계로서 이러한 즉각적인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RB 5,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굳건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물 속에 빠졌지만, 마오로는 단순히 스승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물위를 걸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영성 생활에서 신앙과 순종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할 수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적들은 수도원 주위에서 일어난 반면, 나머지 두 기적들은 호수 주변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이러한 네 가지 기적 이야기는 모두 기도와 밀접히 연관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그러한 기적들은 언제나 성인의 기도 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한편 베네딕도는 수비아꼬를 떠나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히 고려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근 본당에 플로렌시오(Florentius) 라는 한 사제가 있었는데, 그는 사제 서품 이전에 이미 결혼해서 한 아들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인근 본당 신부였던 플로렌시오는 베네딕도 성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당을 떠나 베네딕도 성인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점점 더 성인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사제는 성인을 죽이고자 마음먹고 독이 든 빵을 성인에게 보낸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곧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그것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빵을 물어다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다 내버려라." 까마귀는 잠시 주저한 후에 그것을 물고 날아갔다가 세 시간 후에 되돌아왔다(대화집 제2권, 8). 이 때문에 베네딕도와 까마귀는 항상 예술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네딕도 성인의 메달에는 성인 옆에 언제나 까마귀가 나타난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사제는 이제 성인의 제자들의 영혼을 파괴시키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일곱명의 벌거벗은 처녀들을 들여보낸다. 떼오도시아노 사본(Codex Theodosianus)에 따르면 그 여인들은 아마도 그 지방의 무희들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사제의 시기와 시샘은 결국 베네딕도로 하여금 수비아꼬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꼬바로 수도원과 수비아꼬 수도원에서 베네딕도의 경험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먼저 비꼬바로의 경우는 그 수도자들의 요청에 의해 베네딕도가 그들의 장상이 된 반면, 수비아꼬의 경우는 그 자신이 열 두개의 수도원들을 세우고 그 자신이 장상이 되었다. 그 다음 비꼬바로의 경우는 그곳 수도자들의 타락한 생활 때문에 그곳을 떠난 반면, 수비아꼬에서는 한 사제의 시샘 때문에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베네딕도 성인은 이미 수비아꼬를 떠나 몬테까시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마오로가 플로렌시오의 급작스런 죽음을 전하며 스승께서 다시 되돌아 와 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인은 그 사제의 죽음과 이로 인한 제자 마오로의 기쁨 때문에 오히려 더 슬픔에 잠긴다. 이점은 구약성서의 다윗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다윗도 자신의 적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슬픔에 잠겼었다(사무엘 상 1, 1-27). 

 

비록 마오로가 돌아오기를 간청했을지라도 베네딕도는 몬테까시노를 향해 계속 길을 가고 있었다. 이점에서 우리는 왜 베네딕도가 되돌아가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하느님은 이미 베네딕도에게 수비아꼬에서의 그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렸으며, 성인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도직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하였던 것 같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성인은 새로운 소명을 받았던 것 같다. 둘째는 그 당시 베네딕도는 수비아꼬와 같은 소 공동체들이 아니라, 그보다 큰 하나의 수도원을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수비아꼬는 그의 이상을 위해서는 더 이상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4. 몬테까시노(Monte Cassino)

 

1) 사탄과의 싸움 

 

베네딕도는 몬테까시노의 산 위에다 하나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성인은 그때까지도 계속 사탄과의 싸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우상을 파괴하고 그 제단을 뒤집어엎었으며 우상에게 바쳐진 거룩한 숲의 나무들을 잘라 내었다. 그리고 그는 아폴로 신전에 경당을 지어 성 마르띠노에게 봉헌하였고, 아폴로의 제단 자리에는 또 다른 경당을 지어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였다. 그 후 성인은 설교를 통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이점은 오늘날 모든 베네딕도회의 선교에 대한 기원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탄은 또다시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 큰소리로 베네딕도에게 외치곤 하였다. 사탄은 베네딕도를 거슬러 새로운 폭력의 무기를 가지고 공격하였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였다(대화집 제2권, 8). 이제 사탄은 다른 방법으로 성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수도승들이 수도원의 건물을 지으면서 큰돌을 옮기려 시도했지만 그 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돌 위에 사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베네딕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성인은 직접 와서 기도를 하고 십자 성호를 그었다. 그러자 그 돌은 수도승들에 의해 너무도 쉽게 옮겨졌다(대화집 제2권, 9). 

 

또 다른 어느 날, 사탄은 부엌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조화를 꾸몄다. 그러나 이번 역시 성인은 기도로서 그러한 환상을 즉시 물리쳤다(대화집 제2권, 10). 한편 형제들이 수도원의 벽을 쌓고 있을 때, 사탄은 그 벽을 무너뜨려 한 어린 수도승을 그 밑에 깔리게 하였다. 그러자 성인은 간절히 기도한 후에 그의 몸을 다시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었다(대화집 제2권, 11). 어떤 면에서 베네딕도는 매 순간 사탄과 직면하였지만 그때마다 기도로서 사탄을 물리쳤다. 이 이야기들의 교훈은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시사해 준다. 아무튼 사탄에 대한 베네딕도의 승리는 수 세기 동안 구마의 독특한 한 양식('베네딕도와 십자가')을 낳게 되었다. 


 

2) 예언의 카리스마

 

덕에 더욱 나아간 베네딕도 성인은 이제 예언의 은사까지 행하게 된다. 이 에 대해 그레고리오 교황은 우리에게 많은 일화들을 전해 주고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인상적인 일화들만 살펴보고자 한다. 


 

① 또띨라 왕의 방문

 

542년 동고트족의 왕이였던 또띨라(541-552)는 이태리 남부를 정복하기 위해서 몬테까시노를 지나가게 되는데 그는 예언의 은사를 지닌 베네딕도 성인을 한번 만나 보고자 전갈을 보낸다. 또띨라가 성인의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을 때 그는 성인을 시험해 보고자 호위병이였던 리고에게 자기 신발과 왕의 복장을 입도록 명하였다. 그들의 무리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베네딕도는 즉시 리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들아, 네가 입고 있는 것을 벗어라.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다"(대화집 제2권, 14). 그 순간 그들은 모두 땅에 엎드렸고 후에 또띨라 왕 역시 성인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성인은 그 왕을 꾸짖으며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당신은 로마에 입성할 것이고 또 바다를 건너갈 것이며 9년 동안 다스리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죽을 것입니다"(대화집 제2권, 15). 그레고리오 성인은 또띨라 왕이 실제로 10년째 되는 해에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② 몬테까시노의 멸망을 예언함

 

어느 날 귀족이었던 테오프로포(Theopropus)가 베네딕도 성인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성인은 비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묻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가 세운 이 수도원과 내가 형제들을 위해 마련한 모든 것을 야만인들에게 넘겨주기로 정하셨습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 영혼들을 제게 주십사 하는 청을 하느님께 드려 간신히 승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대화집 제2권, 17). 실제로 몬테까시노는 577년경 롬바르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수도승들은 그곳을 벗어나 로마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은 베네딕도 규칙서(RB)의 필사본을 로마로 가져갔을 것이다. 후에 그들은 라테란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성인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③ 밀가루 200 포대

 

깜빠니아 지방에 큰 기근이 왔을 때, 형제들은 음식이 부족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8가지 악덕 가운데 하나인 '근심'(sadness)의 악덕에 떨어졌다. 요한 가시아노는 수도 생활에서의 모든 세속적인 근심이나 낙담은 극복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세상에 대한 근심은 우리를 죽음에로 인도한다는 것이다(제도서 IX, 10: 12). 베네딕도 성인은 신앙이 부족했던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여러분은 빵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상심하십니까? 오늘은 빵이 부족하지만 내일은 넉넉히 갖게 될 것입니다"(대화집 제2권, 21). 실제로 그 다음날 그들은 수도원의 정문 앞에서 200포대의 밀가루를 발견하였다. 이점에서 우리는 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오직 5개의 빵으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행하셨다(Mt 14, 13-21; Mk 6, 32-44; Lk 9, 10-17; Jn 6, 1-15).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 먼저 복음에서의 빵의 기적은 예수님의 기도 후에 일어난 반면, 대화집에서는 베네딕도 성인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즉시" 이루어 진 반면에 베네딕도의 경우는 "그 다음날"에 일어났다. 이점에서 우리는 베네딕도가 단순히 예언자였지 하느님 자신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기적의 힘

 

① 악령들린 수도자의 치유

 

어느 날, 베네딕도 성인이 성 요한 경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수도자가 악령에 의해 심하게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성인은 단순히 그의 따귀를 때림으로써 악령을 그에게서 즉시 몰아냈다(대화집제2권, 30). 이 이야기는 악령 들린 사람들을 많이 치유해 주었던 성 안또니오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② 나병의 치유

 

위에서 보았듯이 베네딕도는 매번 사탄을 물리쳤다. 더욱이 그는 이제 나병환자를 치유하기까지 한다. 압또니오(Aptonius)의 아버지는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심한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점차 빠지고 피부는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하느님의 사람인 베네딕도에게 보냈다. 그러자 성인은 즉시 그의 건강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었다(대화집 제2권, 26). 이 이야기는 파리에서 한 나병환자를 치유하였던 성 마르띠노의 이야기와도 비슷하다. 이와 같은 예는 성서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한 예로 시리아 왕의 군 사령관이였던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을 때 엘리사는 그를 치유해 주었다(열왕기 상 5, 1-27). 예수님 역시 사마리아와 갈리레아에서 살고 있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치유해 주었다(Lk 5, 12-16; 17, 11-19).



 

③ 죽은 사람의 소생

 

베네딕도의 능력은 살아 있는 자들을 넘어서 죽은 이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 어느 날 성인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농부가 그의 죽은 아들을 안고 수도원에 왔다. 그는 성인을 발견하자마자 울면서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성인은 이러한 기적은 거룩한 사도들의 영역으로써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오히려 그는 더 집요하게 간청한다. 결국 성인은 아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 시신 위에 엎드린 후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주님 제 죄를 보지 마시고 자기 아들의 소생을 간청하는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시어 당신께서 거두어 가신 이 아이의 영혼을 되돌려 주십시오." 성인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 아이는 다시 생명을 되찾게 되었다(대화집 제2권, 32).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 아주 집요했던 복음의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이 그 농부 역시 굳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Mk 7, 24-30). 둘째는 이 이야기가 성서의 기적들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한 예로 예수님 역시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죽은 자를 살려주셨다(Lk 7, 11-17).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베네딕도는 그 소년의 아버지에게 치유된 아들을 다시 되돌려 주었지만 예수님은 과부였던 그 아들의 어머니에게 소생된 아들을 되돌려 주었다. 



 

4) 스콜라스티카의 기적

 

베네딕도 성인의 여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일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성인을 방문하곤 하였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그녀가 방문하자 베네딕도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 소유지 내에 있던 그 만남의 장소로 내려갔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저녁 식사 후에도 지속되었다. 밤이 더욱 더 깊어지자 스콜라스티카는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오빠에게 부탁드립니다. 이 밤에 저에게서 떠나가시지 마시고 아침까지 천상 삶의 기쁨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눕시다". 여기에서 아마도 그녀는 이 만남이 현세에서 오빠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단호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나는 수도원 밖에서 밤을 지새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오빠의 이러한 거절의 소리를 듣자 눈물로써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이에 베네딕도 성인은 누이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스콜라스티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오빠에게 청을 드렸지만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주님께 청하였더니 들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영적 대화를 나누면서 그 날을 보내게 되었다(대화집 제2권, 33). 여기서 그레고리오 교황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이야기는 스콜라스티카의 능력이 오빠의 그것보다도 더 강하였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더 위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능력은 서로 비례함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성녀 모니카가 죽기 몇 일전 오스띠아 띠베리나(Ostia Tiverina)에서 아들 아우구스띠노와 나누었던 영적인 대화와 비교될 수 있다. 스콜라스티카의 경우와 같이 모니카 역시 죽기 몇 일전 아들 아우구스띠노와 거룩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아우구스띠노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더 많은 일화들을 전해 주고 있는(고백록 제9권) 반면, 베네딕도는 그녀의 누이에 대해서 전해 주는 것이 별로 없다. 둘째는 아우구스띠노가 자기 모친의 죽음 때문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을 흘린(고백록 제9권, 12) 반면, 베네딕도는 오히려 누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환시를 보고서는 기쁨과 감사의 찬미를 드렸다(대화집 제2권, 34). 끝으로 모니카의 경우, 자기 아들과 남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묻히지만,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는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다. 



 

C. 죽 음

 

베네딕도는 그의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의 날을 예언하고 죽기 엿새 전에 자신의 무덤을 열어 놓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성인은 열병에 걸렸고 몸은 점점 더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병이 더욱더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자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청한 후에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자신의 임종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이점에서 우리는 베네딕도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의사들에 따르면 아마도 폐렴이 직접적 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리는 성인이 언제 운명하였는지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한편 일데퐁스 슈스터는 성인이 죽음의 순간에 다음의 시편을 되뇌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Suscipe me Domine, secundum eloquium tuum et vivam."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가능성은 있지만 믿을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아무튼 그 날 성인의 제자들 중 두 형제가 서로 다른 곳에서 똑같은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들 모두는 성인의 방으로부터 동쪽의 하늘을 향한 길에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대화집 제2권, 37). 

 

그 당시 베네딕도의 시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스콜라스티카와 함께 세례자 요한 경당 안에 안장되었다. 이점에서 이미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무덤('합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가 동일한 무덤에 안장되었는지 약간 의문이 간다. 한편 우리는 왜 성인이 하늘을 향해 그의 양팔을 들어 올리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는지 궁금하다. 이점에서 우리는 모세의 일화를 기억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빔에서 아말렉인들과 싸움을 할 때 아론과 후르는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떠받침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었다(출애굽 17, 8-16). 베네딕도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두 팔을 벌리고 돌아 가셨듯이 베네딕도 성인 역시 성당에서 두 손을 벌리고 기도 중에 임종하였다. 또한 예수님과 같이 베네딕도도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예언하였다. 즉 예수님이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자신의 장례 일을 위하여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받았던 것(요한 12, 1-8)과 같이 성인은 죽기 엿새 전에 그의 무덤을 열라는 암시를 주었다. 결국 베네딕도는 예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른 셈이었고 또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운명하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IV. 성 베네딕도의 영적 진보

 

위에서 보았듯이 성 베네딕도의 영적 여정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 단계로 볼 수 있다. 즉 떠남과 되돌아 옴의 단계이다. 이러한 여정은 또한 선불교의 십우도의 영적 여정과도 매우 흡사하다.



 

1. 떠남의 단계

 

우리가 먼저 살펴볼 내용은 '떠남의 단계'이다. 베네딕도는 주님만을 찾기 위해서 더욱더 멀리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베네딕도는 처음에 로마를 떠났다(대화집 제2권, 서언). 그 다음 엔피데를 떠났고(대화집 제2권, 1), 길 위에서 한 사람 즉 로마노라는 수도승을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년 간 철저한 고독 속으로 홀로 들어갔다(대화집 제2권, 1). 즉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다음 몇몇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한 사람으로부터, 마침내는 홀로 철저한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영적인 여정(많은→몇몇→한→홀로)은 성 안또니오의 경우와도 비슷하다. 안또니오 역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던 마을을 떠나 묘지로 갔고(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8); 그 다음 묘지를 떠나 더 철저히 홀로 사막으로 들어갔다(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11-12). 그는 사막의 철저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 20년간 생활한다(Athanasius, The Life of Antony, 14). 여기서 베네딕도는 3년 간만 철저한 고독 속에 머무른 반면, 안또니오는 20년 동안이나 완전한 고독 속에 머물렀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시간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철저한 고독으로부터 나왔을 때 이미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과 함께 하느냐 일 것이다. 

 

아무튼 철저한 고독은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시간들은 변형의 용광로와 같아서 우리를 철저히 정화시키고 하느님의 빛에로 초대하며 급기야 하느님과의 변형 일치에로 인도한다. 이에 대해 헨리 나웬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독은 개인적인 치유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오히려 회심의 장소요,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장소이며 새로운 인간이 탄생되는 장소이다." 즉 철저한 고독은 정화와 변형의 장소이자 위대한 자기와의 싸움의 장소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이다. 그래서 초기에 많은 수도승들이 사막으로 혹은 광야로 나아갔던 것이다. 



 

2. 되돌아 옴의 단계

 

베네딕도는 이제 다른 방법으로 더 깊이 세상 안으로 되돌아온다. 위에서 보았듯이 베네딕도는 수비아꼬 동굴에서 3년을 철저한 고독 속에서 보낸 후 한 사제에 의해 발견된다(대화집 제2권, 1); 그 다음 몇몇 목동들에 의해 발견되고(대화집 제2권, 1); 그 후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대화집 제2권, 1). 즉 처음에 한 사제에게 드러났고, 그 다음 몇몇 목동들에 의해 그리고 끝으로 많은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었다(홀로→한→몇몇→많은). 여기에서 우리는 성인이 이 세상을 등지고 점차 멀리 떠나가던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다시 세상 안으로 되돌아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성인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 더욱더 넓게 자신의 문을 열어 간다. 

 

성 안또니오와 같이 베네딕도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자신의 영적 열매를 기꺼이 나누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인은 수비아꼬 동굴에서의 3년 후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고 그분과 최상의 관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태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디아 2, 20). 

 

지금 베네딕도는 자신의 문을 세상을 향해서 더욱더 넓게 열어 놓았다. 이와 비슷하게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은 깨달음을 얻은 한 수행자가 세상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이제 세상 한복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깨달음의 충만함은 도움의 손길을 갖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것은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베네딕도는 도움의 손길을 갖고 이 세상 안으로 되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성인은 자신의 온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분께로 안내하였다. 



 

V. 결 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네딕도 성인의 전 삶은 하느님만을 향한 영적 여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하느님만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물러남은 결코 세상에 대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안에 더 깊이 투신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만일 베네딕도의 생애의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십중팔구 곧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즉 베네딕도 성인의 삶에서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만을 강조하다 보면 현실을 등한시하고 급기야는 현실도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세상 안으로 만을 강조하다 보면 뿌리 없는 활동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과 '세상에로의 되돌아 옴'은 언제나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의 영성 생활은 균형을 잃지 않고 올바로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려 갈 수 있으리라 본다. 

 

오늘날 베네딕도의 영적 여정은 시대를 초월해서 현대의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은 대화집을 집필하면서 진실로 베네딕도 성인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대한 충만한 사랑에로 인도하고자 했다. 본인은 베네딕도 성인의 다음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RB 72, 11-12).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이 글은 신학전망 제132호에 실린 글임

bottom of page